[정종태 칼럼] 정치인 한전 사장이 해선 안 되는 일
문제의 번지수가 틀리면 엉뚱한 해법이 나오기 마련이다. 한국전력의 경우가 딱 그렇다. 시장의 우려를 무시하고 정치인 사장을 임명했다. 한전 창사 이후 첫 정치인 낙하산이다. 방만 경영을 바로잡고 온갖 비리로 점철된 공룡 같은 조직을 뜯어고치라는 메시지로 읽혔다. 조직 내부 군기를 잡기엔 정치인만 한 대안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방만 경영을 바로잡고, 내부 비리를 척결한다고 해서 한전이 되살아날까. 한전이 고꾸라진 근본 원인은 첫째 왜곡된 에너지 가격 구조에 있고, 둘째는 정부의 잘못된 정책(탈원전)의 결과다. 내부 비리와 방만 경영은 그 부실을 더 키운 양념일 뿐.

일각에서 한전 부실의 주요인을 전 정부의 탈원전 정책 탓으로 돌리긴 하지만, 탈원전 정책에 맞춰 액화천연가스(LNG) 등 비싼 에너지 도입 비중을 높이느라 비용 구조가 악화한 건 전체 부실의 일부에 불과하다. 수치로 분석해도 2017년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올해 2분기까지 누적 적자 54조원 가운데 43조원은 국제 유가 급등에 따른 원가 인상분을 해소하지 못한 탓이다. 한마디로 전기요금을 올렸어야 하는데 묶어놓은 탓이 크다는 얘기다.

거꾸로 말하면 왜곡된 에너지 가격 구조를 되돌리지 않고선 한전의 누적 적자를 해소할 방도가 마땅치 않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렇다면 윤석열 정부는 이 근본 원인을 해소할 수 있을까. 섣부른 예단일지 모르지만, 정치인 낙하산 인사를 보면 결코 쉽지 않을 것 같다. 김동철 신임 사장도 주변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추석 연휴도 반납하고 야전침대에서 자며 업무를 챙길 정도로 의욕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딱 예상대로다. 그가 사장으로 취임하면서 밝힌 포부를 보면 문제의 핵심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지 의구심이 든다. “전기요금에만 모든 것을 거는 회사가 돼서는 안 된다”고 취임 일성을 내뱉었지만, 전기요금 문제에 올인하지 않고서 200조원이 넘는 역대급 부채를 해결할 방도가 있는지 되묻고 싶다.

김 사장이 비교 대상으로 언급한 KT와 포스코도 문제 인식의 출발이 잘못돼 있다. KT와 포스코가 과점주주 형태로 불완전 민영화가 된 이후 지난 30여 년간 생존을 위해 변신을 거듭한 것은 맞다. 100% 유선전화 회사이던 KT가 유·무선, 콘텐츠, 금융, 클라우드 등을 아우르는 디지털 플랫폼 기업으로 탈바꿈한 것은 놀라운 성과다. 포스코 역시 철강을 넘어 2차전지 사업으로 영역을 확장했다.

하지만 한전이 결정적으로 KT, 포스코와 다른 게 있다. 독점 사업자란 점이다. 독점은 필연적으로 안주하고 도전을 싫어하게 만든다. 전력 판매 사업의 독점을 깨지 않는 한 한전을 글로벌 종합 에너지 사업자로 키우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김 사장은 취임 이후 여론의 눈치를 본 것인지, 전기요금에 대해 갈지자 행보를 보이고 있다. 취임사에선 전기요금에만 매달리지 말자고 하더니 첫 기자간담회에선 요금 인상을 들고나왔다. 그는 4분기 ㎾h당 25.9원 인상안을 제시했으나, 실현될 것으로 보는 이는 많지 않다. ㎾h당 25.9원이면 4인 가구 기준으로 월평균 8000원가량 부담이 늘어나는 꼴인데, 지난겨울 ‘난방비 폭탄’으로 곤욕을 치른 정부와 여당이 내년 총선을 앞두고 용단을 내릴 수 있을까. 용산 대통령실도 지지율 하락을 우려해 요즘 매일 김대기 비서실장 주재로 고물가 대책회의를 연다는데 이런 마당에 전기요금 인상이 가당키나 하겠는가.

이번에도 전기요금 인상을 미룬다면 결과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뻔하다. 한전 적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쌓인 부채는 결국 국민 혈세로 메워야 한다. 에너지 과소비를 부추겨 무역적자를 키우는 것은 또 다른 리스크다. 한전채 발행을 늘릴 경우 시장 구축효과로 채권시장을 뒤흔드는 일도 벌어질 것이다.

사실 한전 사장이란 자리가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긴 하다. 전기요금은 주무부처인 산업통상자원부가 물가당국인 기획재정부 동의를 얻어 결정한다. 설사 기재부 반대를 넘었다고 해도 당정 협의를 통해 무산되기 일쑤다. 그래서 전기요금도 세금처럼 정치가 된 지 오래다.

하지만 김 사장은 정치인이라는 점에서 역설적으로 기대를 걸어볼 여지도 있다. 그가 정치력을 발휘해 정부와 여당의 외풍을 돌파한다면 한전 역사를 바꾼 최고경영자(CEO)로 남을 수 있다. 허망한 기대일지 모르지만, 김 사장의 정치력에 희망을 걸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