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광·조선 빅딜마다 '홈런'…진격의 한화 이끄는 '상남자 회장님'
29세때 회장…방산·우주 보폭 넓혀 캐시카우 창출
이라크 직원 위해 광어회 600인분 공수한
의리왕
외환위기때 고용승계 내걸고 회사가격 낮춰 매각도
‘구조조정의 마술사’ ‘다이너마이트 주니어’ ‘의리왕(王)’ ‘상남자 회장님’ ‘한화의 아버지’.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71)에게 따라붙는 별칭이다. 이 별명의 기반이 되는 신념은 ‘신용과 의리’다. 그의 삶과 경영 철학을 가장 잘 요약해주는 두 단어다. 누구보다 의리를 중요하게 여겼던 김 회장은 다른 기업 오너들과 다르게 독특한 행보로 경영계에 수많은 일화를 남겼다.
“내가 마신 술이 유조선으로 5~6척은 될 것”이라는 농담은 그의 강한 이미지를 보여주는 단면이다. 반면 회장 자리를 맡은 40여년간 직원을 가족처럼 아끼고, 그들이 처한 상황을 ‘자신의 일’처럼 여기며 ‘따뜻한 경영자’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1999년 강도 높은 구조조정으로 직원 25%를 내보낸 뒤 “마취도 하지 않은 채 폐를 잘라내는 기분”이라고 회고한 게 대표적이다.
한국과 그리스의 교류에 공헌한 공으로 받은 그리스 피닉스 대훈장.
한국과 그리스의 교류에 공헌한 공으로 받은 그리스 피닉스 대훈장.

카리스마로 무장한 김승연 스타일

김 회장의 성격은 선친인 김종희 한화 창업회장의 교육에서 비롯됐다. 김 창업회장은 경기상고 재학 시절 럭비부의 일본인 학생이 조선인 학생을 괴롭히자 몸싸움을 벌인 끝에 그를 제압했다. 이 일로 퇴학당해야 했을 정도로 피해를 봤지만 김 창업회장은 의리와 정의를 중시했다고 한다. 호방한 성격의 김 창업회장은 평소 장남인 김 회장에게도 호연지기를 강조했다. “남자가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우며 단맛 쓴맛 다 봐야 한다”며 “나중에 훌륭한 인물이 되려면 쓸데없는 건 하나도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상남자’로 일컬어지는 ‘김승연 스타일’은 이 같은 가풍에 따라 어린 시절부터 형성됐다. 어렸을 때 성공회 성당에서 복사(미사를 돕는 신도) 활동을 했고, 지금도 성공회를 종교로 믿고 있다. 경기고 재학 시절엔 김 창업회장을 따라 공장을 돌며 일찍부터 현장 교육을 받았다.

그는 부친이 갑작스레 유명을 달리하며 1981년 스물아홉 나이에 회장 자리에 올랐다. 어린 나이에 마음의 준비 없이 그룹 1인자에 오른 만큼 그는 외로웠을 것이다. 김 회장은 우선 외모에서부터 관록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헤어 스타일을 ‘올백’(머리카락을 모두 뒤로 넘긴 형태)으로 바꿨다. 아버지를 모셨던 그룹 중역에게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군기도 엄하게 잡았다고 한다. ‘이립(而立)’을 앞둔 청년 회장이 택한 생존 방식은 카리스마를 내세운 ‘보스 경영’이었다.

“내가 마신 술만 유조선 6척” … 애주가이자 끽연가

김 회장은 끽연가이자 애주가다. 소주부터 양주를 섞은 폭탄주까지 주종을 가리지 않는 것으로 전해진다. 담배도 하루에 한두 갑은 너끈히 피웠다. 공식 석상에서도 담배를 만지는 장면이 간혹 포착됐다. 2019년 문재인 정부 시절 청와대로 향하는 버스로 걸어가면서 주머니에 손을 넣고 담배를 문 모습이 대표적이다. 비서가 “여기서 피우시면 안 된다”고 만류하자 그는 담배를 다시 넣었다.
2011년 8월 7일 잠실구장을 방문한 한화 김승연 회장.
2011년 8월 7일 잠실구장을 방문한 한화 김승연 회장.
주변인에게 꽃 선물하길 좋아하는 섬세한 면모도 갖췄다. 2018년 한화이글스가 프로야구 포스트시즌에 11년 만에 진출했을 때였다. 대전구장을 방문한 ‘야구광’ 김 회장은 관중석에 앉은 3000여 명의 관객에게 장미꽃 한 송이와 감사 카드를 돌렸다. 1차 누리호 발사를 실패했을 때도 개발에 참여한 임직원에게 꽃과 위로의 편지를 보냈다.

2003년 한화생명의 연말 시상식에선 여섯 시간에 걸친 행사를 끝까지 참석한 적도 있다. 우수 설계사를 선정하는 당시 행사에서 그는 “설계사 여러분은 나의 동료이자 동생이고, 누님이고 또 내 아내와 같은, 가족과 다름없는 분”이라고 했다. 회식에 참여한 여느 직장인처럼 와이셔츠 차림으로 애창곡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를 열창하기도 했다.
김승연 회장이 한화생명 설계사들을 격려하고 있다.
김승연 회장이 한화생명 설계사들을 격려하고 있다.
‘신의’를 최고 가치로 여기는 김 회장은 주변인과 직원들을 가족처럼 아끼는 것으로 유명하다. 직원들은 이런 김 회장을 ‘한화의 아버지’라고 스스럼없이 부른다. 재계 관계자는 “직원들에게 기업 오너는 통상 ‘연예인’처럼 먼 존재로 인식되기 마련인데, 김 회장은 이와 완전히 다른 이미지”라고 말했다. 그가 남긴 수많은 일화는 지금도 기업인 사이에 회자되고 있다. 외부에 알려진 것과 달리 다정다감하고 위트가 있다는 게 그를 자주 만난 사람들의 공통적인 전언이다.

가족처럼 직원 아낀 ‘한화의 아버지’

구조조정 당시 일화가 그의 이런 성품을 가장 잘 설명해준다. 1997년 외환위기 당시 한화는 다른 그룹과 마찬가지로 존폐의 기로에서 유동성 위기에 몰렸다. 그는 ‘지나치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강도 높은 구조조정에 나섰다. 화학, 유통, 레저, 금융 등 핵심 업종만 남기고 선제적으로 매각을 완료했다. 밤새 임원들과 토론하며 결정을 내리느라 몇 달 새 6~8㎏ 정도 체중이 빠지기도 했다. “뼈를 깎는 게 아니라 마취도 하지 않은 채 갈비를 들어내고 폐를 잘라내는 기분이었다”는 게 그의 회고다. 이 과정에서 산케이신문 등 주요 외신으로부터 ‘구조조정의 마술사’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다.
2005년 사랑의행진에 참가한 김승연 회장.
2005년 사랑의행진에 참가한 김승연 회장.
직원들의 고용 승계를 위해 가격을 깎아서 팔기도 했다. 한화에너지 정유 부문을 매각할 당시 김 회장은 정몽혁 현대정유(현 HD현대오일뱅크) 사장을 만나 20억~30억원 더 싸게 넘길 테니 모든 근로자의 고용을 승계해 달라고 제안했다. 10억원이 아쉬웠던 때인 만큼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당시 한화에너지 706명, 한화에너지인프라 456명의 모든 직원이 해고되지 않고 적을 옮겼다.

직원 600여명 4개월간 유급 휴직 ‘파격’

그의 ‘직원 사랑’ 에피소드는 2010년대 들어서도 이어졌다. 2010년 서울 소공동 더플라자호텔을 6개월간 리모델링할 때 600여 명 직원 모두 4개월간 유급 휴직을 보내 화제가 됐다. 직장인으로서는 상상도 못할 안식 휴가였다. 2014년엔 이라크 건설 현장에서 고생하는 한화건설 직원들을 위해 광어회 600인분을 서울에서 공수해 나르기도 했다. 사막밖에 없던 건설현장에서 직원들이 가장 먹고 싶어 한 음식이었다고 한다. 한화 이글스 야구단의 유승안 전 감독 아내가 암투병할 때도 김 회장은 병문안을 했다. 그는 마치 가족이 투병 중인 것처럼 눈물을 뚝뚝 흘렸다고 한다. 수행하던 측근들도 덩달아 눈물을 흘렸을 정도다.

이런 사례 때문에 그에게서 가족을 위해 헌신하는 1980년대 아버지상(像)을 찾는 이도 있다. 김 회장은 세 아들을 교육시킬 때 “내가 회장이 될 때 내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며 “하지만 너희는 내가 지킬 테니 걱정하지 마라”고 말했다고 한다.
1987년 김승연 회장이 첫째 아들(김동관)과 일본 여행을 갔다(왼쪽). 1988년 김승연 회장이 첫째, 둘째 아들(김동원)과 어린이날을 즐기고 있다.(오른쪽).
1987년 김승연 회장이 첫째 아들(김동관)과 일본 여행을 갔다(왼쪽). 1988년 김승연 회장이 첫째, 둘째 아들(김동원)과 어린이날을 즐기고 있다.(오른쪽).
한화는 김 회장 취임 이후 수십 건의 인수합병(M&A)을 성사시키며 성장해왔다. M&A는 한화의 핵심 성장동력으로 불린다. 부실기업을 주로 인수했던 터라 인수 과정에서 반대가 극심했던 게 공통점이다. 하지만 김 회장이 지닌 승부사적 기질을 바탕으로 적기에 인수한 이들 회사는 지금 그룹의 주력 계열사로 자리잡았다.

김 회장은 취임 직후인 1982년 ‘제2차 석유파동’으로 휘청거리던 한양화학과 한국다우케미칼(현 한화솔루션의 케미칼 및 첨단소재 부문)을 인수했다. 당시 적자가 각각 80억원, 430억원에 달한 데다 일본의 석유화학 기업들이 사양길로 접어들고 있어 반론이 심했다. 회장에 오른 뒤 처음 진행하는 M&A건이라 부담도 많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들 기업은 인수 이후 한국 석유화학 산업의 핵심 기업으로 성장하며 지금도 한화그룹의 ‘캐시카우’ 역할을 하고 있다.
로버트 김과 대화를 나누는 김승연 회장.
로버트 김과 대화를 나누는 김승연 회장.
M&A 성공의 단맛을 본 김 회장의 눈은 금융으로 향했다. 2002년 적자를 이어가던 대한생명(현 한화생명)을 인수해 금융 계열의 기틀을 마련했다. 독일기업 큐셀을 2012년 인수해 미래 먹거리인 태양광 사업에 뛰어들었다. 큐셀은 2008년 태양광 생산능력 글로벌 1위였지만, 중국 업체의 추격으로 당시 파산했다. 국내 기업들도 태양광 사업에서 발을 빼던 터라 증권사 애널리스트들은 ‘매력적이지 않은 거래’라며 비판했다. 그러나 김 회장은 ‘태양광 사업은 국가와 인류에 기여하는 길’이라는 일념으로 한화큐셀 정상화에 매진했다.
태양광·조선 빅딜마다 '홈런'…진격의 한화 이끄는 '상남자 회장님'
2014년엔 삼성그룹의 방산, 화학 계열사 네 곳을 한 번에 인수하는 ‘빅딜’을 통해 방산과 에너지 분야에서 국내 톱 수준의 기업으로 거듭났다. 이들 4개사의 독립적인 경영을 보장했고 삼성 시절 임직원 처우와 근로조건도 유지했다.

최근엔 한화오션(옛 대우조선해양)을 인수하며 M&A 역사를 새로 썼다. 김 회장이 2008년 대우조선 인수전에 뛰어들었을 때만 해도 현대중공업, 포스코그룹 등에 비해 경쟁력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았다. 조선업을 해본 경험이 없고, 조선업과 연관된 사업도 거의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됐지만 자금 조달 문제와 산업은행과의 이견으로 인수가 무산됐다. 15년이 지난 2023년 김 회장은 끝내 대우조선을 품었다.

장교동 사옥 출근하며 금주로 건강 관리

‘강골’로 통하던 상남자도 세월의 흔적을 벗어날 수는 없었던 걸까. 김 회장은 2018년 지병으로 건강이 악화하면서 병원 신세를 지기도 했다.
현암 김종희 탄생 100주년 기념식에서 세 아들과 함께 사진을 찍는 김승연 회장.
현암 김종희 탄생 100주년 기념식에서 세 아들과 함께 사진을 찍는 김승연 회장.
지금은 과거보다 건강이 많이 호전된 것으로 알려졌다. 재계에 따르면 김 회장은 1주일에 두어 차례 서울 장교동 한화 본사에 나와 주요 사안을 결정하고 서류를 결재한다. 한화그룹 관계자는 “회장님이 출근하면 내일이나 모레 보고하려고 준비하던 사업 현안을 서둘러 보고하기 위해 사무실이 분주하다”며 “분위기만 봐도 출근하셨는지 알 수 있다”고 했다. 최근 인수한 한화오션도 김 회장의 최종 결재를 거쳤다고 한다.

다만 예전만큼 건강이 회복되진 않은 터라 담배는 피우지만 술은 끊었다고 한다. 저녁 자리의 주종(酒種)이 와인이면 포도주스를, 맥주면 보리차 등 색이 비슷한 음료를 따라놓고 함께 건배한다. 간혹 골프도 친다. 귀빈을 대접하거나 ‘프라이빗’한 분위기에서 대화가 필요할 때 골프장을 찾는 것으로 전해졌다. 강원 춘천시 제이드팰리스, 경기 일산 신원동 뉴코리아CC 등을 찾아 9홀 정도를 친다고 한다.

김형규 기자 kh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