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넥스포에 참석한 와인 생산자들이 와인을 따라주며 설명하고 있다.
비넥스포에 참석한 와인 생산자들이 와인을 따라주며 설명하고 있다.
싱가포르의 상징과도 같은 마리나 베이 샌즈. 지하에 들어서자 향긋한 포도 내음이 코끝을 맴돌았다. 기분 좋은 향기의 정체는 세계 각국의 와이너리가 들고 온 와인들. 프랑스, 이탈리아, 미국, 스페인, 호주 등 세계 와이너리 1000곳의 대표 와인들이 싱가포르를 가득 채웠다. 이 작은 나라 싱가포르는 1년 내내 특별한 글로벌 행사들로 넘쳐난다. 그중 지난달 열린 세계 최대 와인 박람회 비넥스포(VINEXPO)를 가봤다.

이곳에 방문하려면 필수품이 하나 있다. 바로 와인잔! 잔을 들고 여유롭게 돌아다니다 눈에 띄는 와인병을 발견하면 걸음을 멈추고 바로 시음할 수 있다. 이 글은 ‘와알못(와인을 잘 알지 못하는)’ 기자가 싱가포르에서 사흘간 취해버린 체험기다.

어느 와인부터 맛봐야 할지 ‘행복한 고민’에 빠졌을 때 눈앞에 보인 건 나파밸리의 와인들. 나파밸리는 미국 캘리포니아의 와인 생산지로 미국의 대표적인 명품 와인들이 이곳에서 나온다.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을 비롯해 윤석열 대통령까지 역대 한·미 정상회담의 만찬을 장식한 것도 나파밸리에서 생산된 와인이다.

요즘 국내에서 인기가 많은 ‘오린 스위프트’ 와이너리 부스가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각각의 와인마다 지닌 스토리와 예술적인 레이블이 특징인 곳. ‘파피용(papillon) 2019’ 앞에 잔을 내밀었다. 진한 루비색에서 진득한 체리향과 다크 초콜릿 뉘앙스가 풍겼다. 미국 와인 특유의 진한 보디감이 입안을 사로잡았다. 바로 옆 ‘팔레르모(palermo) 2021’도 연달아 시음했다. 입에 넣자마자 강렬한 타닌감이 혀를 사로잡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부드럽고 크리미한 맛으로 변했다. 마법과도 같은 와인이었다.

바로 옆 ‘셰이퍼’ 부스도 와인 애호가들로 붐볐다. 이곳의 대표 와인은 ‘원 포인트 파이브(one point five)’와 ‘TD-9’ 등이다. 원 포인트 파이브 2019년산을 한 모금 들이켜자 과실향과 함께 비 온 뒤 숲 같은 싱그러운 풀냄새가 어우러졌다. TD-9은 진한 블랙베리 맛과 스파이시한 맛이 특징. 매콤한 한국 음식에 잘 어울릴 것 같은 풍미다.

네 잔을 연거푸 비우고 난 뒤 누군가 옆에서 말렸다. “시작부터 다 먹으면 취해요!” 그제서야 박람회장 중간중간 놓인 검은색 큰 통들이 보였다. 시음 후 남은 와인을 버리는 통이다. 여러 와인을 맛보고 즐기기 위해선 눈물을 머금고 과감하게 버리는 용기가 필요하다. 아, 고대 로마의 귀족이 이런 기분이었을까. 서둘러 다른 지역 와인이 모여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프랑스 남서부의 보르도는 세계 최고 품질의 와인을 생산하는 곳. 보르도의 유명 샤토들이 각자의 대표 와인을 들고 와 전시관 방 하나를 가득 채웠다. 한 병에 만원이 안 되는 저렴한 와인부터 1000만원 넘는 고급 와인까지 마음껏 시음할 수 있다. 눈에 띄는 ‘샤토 르 게이(Chateau Le Gay)’와 ‘샤토 도작(Chateau Dauzac)’ 등을 맛본 뒤 ‘샤토 쉬뒤로(Chateau Suduiraut)’ 등 달콤한 디저트와인으로 마무리했다.

사흘간 마리나 베이 샌즈 컨벤션 센터 내에서 열리는 행사는 매일 오후 5~6시에 끝나지만 진짜 역사는 밤에 쓰여진다. 이 박람회를 위해 모인 세계 와인·식품업계 관계자들이 밤늦게까지 여는 비즈니스 혹은 친목 모임이 하이라이트. 와인업계 종사자들이 각자 박람회장에서 발견한 좋은 와인을 들고 와 와인 이야기로 밤을 새우는 모습이 종종 눈에 띈다.

지난 5월 23일부터 사흘간 싱가포르에서 열린 이 박람회엔 64개국 9989명의 와인업계 종사자가 모였다. 코로나19 확산 이전 2018년 홍콩에서 개최된 뒤 5년 만에 열리는 정식 행사다.

싱가포르=신연수 기자 sy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