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혼주의라더니"…'29세 연하女와 동거'에 쏟아진 비난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
영국 19C 회화 거장 프레데릭 레이턴
'착한 금수저 미남 천재' 완벽했던 인생
29살 차이 여성과 동거에 '가십의 중심' 돼
무슨 일이 있었길래
'착한 금수저 미남 천재' 완벽했던 인생
29살 차이 여성과 동거에 '가십의 중심' 돼
무슨 일이 있었길래
1895년 영국 런던의 한 미술관. 그림 앞에 선 관객이 이렇게 중얼거리자 옆에 있던 사람들이 ‘빵’ 터졌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작품을 그린 화가가 ‘런던에서 가장 유명한 비혼주의자’였거든요. 키 큰 미남인데 그림 실력도 천재적. 돈 많고 성격 좋고 사교성 좋은데다 노래까지 잘하니 수많은 여성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지만, “나는 예술과 결혼했다”며 독신을 고수하던 남자였습니다.
그런데 이 양반, 쉰 살 넘은 나이에 늦바람 든 걸까요. 나이 차이가 29살이나 나는 하류층 여성과 동거하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연예계 사람들을 만나서 “이 아이를 배우로 써달라”고 부탁까지 하고 다닌다네요. ‘그냥 모델일 뿐’이라지만, 이 그림을 보세요. 누가 봐도 화가가 모델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이 뻔히 보이잖아요.
둘이 결혼이라도 하면 모르겠는데, 그건 또 화가가 싫다네요. 사람들은 쑥덕거립니다. “하류층 여성이니 데리고 놀다 버리겠다는 심보인가? 여자만 불쌍하게 됐어.” “다 늙어서 주책이야, 정말.” 소문의 주인공은 영국 신고전주의 화가이자 조각가였던 프레데릭 레이턴(1830~1896). 오늘 ‘그때 그 사람들’에서는 이 화가의 이야기를 풀어 보겠습니다.
희대의 ‘엄친아’, 딱 하나 없었던 게…
너무 어린 나이에 최고가 된 레이턴. 질투하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그는 미술계와 사교계의 스타가 됩니다. 그림 실력과 특유의 친화력, 겸손한 성품 덕분이었지요. 돈을 많이 번 건 물론이고, 34세였던 1864년에는 왕립예술원의 준회원이 되는 명예도 얻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그를 ‘주피터 올림포스’라고 불렀으니 말 다 했습니다. 그리스·로마 신화를 소재로 한 그림을 많이 그렸다는 뜻도 있지만, ‘최고의 신에 비교할 만큼 완벽한 사람’이라는 뉘앙스가 담겨 있는 별명이었습니다.
뒤늦게 만난 평생의 사랑
그렇게 50대에 접어든 레이턴. 늦은 나이에 ‘평생의 사랑’을 만나게 됩니다. 1881년 동료 화가의 스튜디오를 방문했다가, 모델을 서던 22세의 여성과 눈이 마주친 겁니다. 레이턴은 즉시 그녀를 자신의 그림 모델로 고용합니다. 자기 집 바로 옆에 그녀와 가족이 살 수 있는 집을 얻어주고, ‘도로시 딘’이라는 예명까지 지어 줬습니다. 그리고 둘은 항상 꼭 붙어 다녔습니다.
“레이턴이 딘의 곁을 지키면서도 침묵했던 건 사랑하는 여자의 꿈을 이뤄주기 위해서였다.” 이스라엘의 전기 작가 엘리앗 네게브와 예후다 코엔은 저서 <플레이밍 딘>에서 침묵의 이유를 이렇게 분석합니다. 딘이 하류층 출신이라는 한계를 넘어 배우의 꿈을 이룰 수 있었던 건 레이턴의 지원 덕분이었습니다. 하지만 결혼은 안 될 일. 지독하게 보수적이었던 빅토리아 시대, 기혼 여성이 배우로 일하는 건 쉽게 용납되지 않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딘이 꿈을 이루는 걸 도우면서도 커리어에 폐를 끼치지 않으려면 레이턴으로서는 이런 식의 처신이 최선이었다는 얘깁니다.
딘은 훗날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60살이 넘었지만 레이턴은 내가 아는 가장 젊은 남자다. 그리고 가장 친절하고, 관대한 남자다.”
죽음, 그리고 잊혀지다
물론 작품의 주 모델은 딘이었습니다. 작업실에서 딘은 포즈를 취했고 레이턴은 그림을 그렸습니다. 이 세상에서 함께 보낸 마지막 몇 달의 시간 동안, 둘 사이에는 별다른 말이 필요 없었습니다. 그림이 대신 말할 뿐이었습니다.
이 작품을 채 완성하지 못하고 레이턴은 1896년 세상을 떠납니다. 딘에게는 상속자 중 가장 많은 5000파운드의 유산을 남겼고, 딘의 가족을 지원하기 위해 별도로 5000파운드를 더 남겼습니다. 지금 한국 돈으로 따지면 15억원정도 되는 돈입니다. 하지만 레이턴의 배려에도 불구하고 딘은 행복한 삶을 보내지 못했습니다. 3년 뒤 병에 걸려 불과 40세의 나이로 세상을 등졌거든요. 여기엔 레이턴에 대한 그리움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입니다. 레이턴이 죽은 후 딘이 두 번 다시 화가의 그림 모델을 서지 않은 게 그 방증입니다.
남의 시선, 뭐가 중요한가
다행히도 1960년대부터 레이턴의 작품세계에 대한 재평가 바람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레이턴은 빅토리아 시대의 위대한 영국 화가로, 플레이밍 준은 ‘남반구의 모나리자’로 불리는 세기의 명작으로 대접받게 됐습니다. 레이턴의 연인이자 배우였던 딘에 대한 관심도 커졌지요. 이에 따라 둘의 사랑 이야기도 재조명받게 됩니다.
레이턴의 사랑 이야기와 아름다운 작품들을 기사로 소개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상의 규칙을 완전히 거부하면서 살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때로는 레이턴처럼 타인의 시각이나 편견을 어느 정도 무시해야 얻을 수 있는 행복도 있습니다. 간절히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그게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 방향이 옳다고 확신한다면, 용기를 내서 그 길을 계속 가세요. 그렇다면 사랑이 됐든 일이 됐든, 그 길은 아름다운 작품으로 남을 것입니다.
좋은 주말 보내세요.
*기사 내용에 들어 있는 정보는 각 미술관 홈페이지, 엘리앗 네게브와 예후다 코엔이 쓴 책 ‘Flaming Dene :a victorian stunner’에서 참조했습니다.
<그때 그 사람들>은 미술과 고고학, 역사 등 과거 사람들이 남긴 흥미로운 것들에 대해 다루는 코너입니다. 토요일마다 연재합니다. 쉽고 재미있게 쓰겠습니다. 기자 페이지를 구독하시면 연재 기사를 비롯해 재미있는 전시 소식과 미술시장 이야기를 놓치지 않고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