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일훈 칼럼] 피크아웃에 대한 유토피아적 상상력
오늘 글의 키워드는 유토피아(utopia)다. 다소 뜬금없을 수도 있다. 불안한 미래에 대한 상상력을 작동하는 착안점 정도로 생각해주시면 좋겠다. 현재 우리나라의 가장 큰 고민은 피크아웃(peak out) 가능성이다. 경제 성장과 문화 융성이 정점에 달한 만큼 지금부터는 내리막길만 남았을 것이라는 두려움이다. 산업이 성숙단계에 접어들면서 노동생산성과 기술경쟁력이 정체되고, 이념 계층 세대 노사 지역 갈등을 조율해야 할 정치적 규범과 문제 해결 능력은 오히려 퇴락하고 있다. 사회 전반에 윤리의식과 도덕적 품격이 떨어지면서 저출산 1위, 전세 사기 1위, 자살률 1위, 낙태율 1위, 고아 수출 1위라는 디스토피아가 연출되고 있다.

디스토피아는 유토피아의 그림자다. 유토피아가 없으면 디스토피아도 없다. 유토피아는 현실적 조건 속에서 꿈꾸고 소망하는 것이었다는 점에서 망상이나 환각과 대비된다. 오랜 세월 사람들의 가슴 속에서 피어나고 지기를 반복한 정신이고 마음이었다. 가난과 결핍은 산업혁명이 시작되기 전까지 모든 인류의 고통이고 고뇌였다. 중세 유럽 농노들이 상상의 나래를 펼친 환락의 낙원, ‘코카인’이 현대 마약의 대명사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핍박받는 사람들의 공상 속에 머무르던 유토피아가 근대적 세계관과 접점을 찾도록 한 첫 번째 작품은 토머스 모어(1478~1535)가 1516년 출간한 <유토피아>였다. 근대 철학의 기념비적 출발을 알린 이 소설은 유럽 사회의 부패와 탐욕을 통렬하게 비판했다. “양은 온순한 동물이지만 영국에서는 인간을 잡아먹는다”는 구절은 대지주들이 양을 키우기 위해 농민들을 소작농지에서 몰아내는 세태를 통렬하게 꼬집었다. 모어의 비판과 풍자가 오랫동안 울림을 준 이유는 그 자신이 당대 영국의 정치가이자 법률가로서 지배계급의 정점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현실 속에서는 헨리 8세 왕정 체제를 수호하는 역할을 했지만, 부당한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과 개혁 의지만큼은 대단했다는 평가다. 대안으로 제시한 국가상도 파격적이었다. 정치적으로는 대의민주주의, 경제적으로는 공동소유제, 사회적으로는 신분제 철폐였다. 하지만 당장 생산력을 끌어올릴 수 없었던 시대를 살았던 모어가 그린 이상국가는 ‘빈곤의 평등’에 머물렀다. 구성원들은 국가의 엄격한 통제를 받으며 욕망을 절제해야 하는 나라였다.

모어의 정태적 세계관을 역동적으로 바꾼 것은 <유토피아>가 나온 지 100년 이상이 지나 출간된 영국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1561~1626)의 <신(新)아틀란티스>였다. 그는 가난과 질병이 생산 기술의 낙후에서 비롯된 만큼 과학기술을 발달시키면 생산력 증대를 이룰 수 있다고 봤다. 사유재산과 가족제도를 인정하고 국가가 직접 교육기관을 꾸려 과학을 창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영국이 베이컨 사후 40여 년 뒤에 설립한 영국왕립학회는 물리 수학 중심의 자연과학 탐구와 관찰·실험을 중시하는 실증적 세계관을 앞세워 훗날 산업기술의 비약적 발전을 가능케 한 토대를 닦았다. 아이작 뉴턴, 찰스 다윈,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로버트 보일, 제임스 와트, 알렉산더 플레밍, 리처드 도킨스, 스티븐 호킹 등이 모두 이 학회 출신이었다. 모어의 경제적 평등이 사회주의 이념에 심오한 영향을 끼쳤다면 인간의 잠재 능력을 신뢰하면서 기술과 산업으로 물질적 풍요를 이룰 수 있다는 믿음을 제공한 베이컨은 자본주의와 자유시장의 기틀을 닦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들의 유토피아적 세계관이 각각의 갈래로 진화와 퇴보를 거듭하면서 1, 2차 세계대전과 전체주의 등장, 과학기술에 대한 불신과 인간 소외, 사회 양극화 등의 디스토피아적 반발을 초래한 것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당대의 현실을 개혁하고자 했던 발상의 자유로움과 담대함만큼은 특별하게 인정하고 존중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좌우보혁의 체제 경쟁도 오래전 사람들이 꿈꾸고 소망한 세상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봐야 한다.

이제 유토피아의 착지점이다. 인류 문명은 앞으로도 계속 발전하고 융성할 것이며 지금보다 나은 물질적 풍요를 누릴 것이다. 경제적 불평등은 갈수록 완화되고 결핍은 최소화될 것이다. 지금 사는 시대가 힘들다고 해서 이 같은 유토피아적 상상마저 외면하거나 거부할 자유는 우리에게 없다. 500여 년 전에 그토록 척박한 세상을 살았던 사람들조차 보다 나은 미래를 가슴 깊이 열망하지 않았던가. 가까이는 불과 60여 년 전 맨주먹으로 경제와 산업을 일으킨 위대한 국민과 기업들이 바로 우리 자신이지 않은가.

조일훈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