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만 구독' 어린이誌 검열 분석 논문…일제는 잡지 삭제·몰수
소파 방정환(1899∼1931) 선생이 창간한 '어린이' 잡지가 단순한 언론 매체를 넘어서 식민지배 저항운동의 성격을 띠었다는 평가가 학계에서 제기됐다.

당시 일본 경찰이 어린이지 원고 전체를 몰수하는 등 다른 매체보다 더 예민하게 검열을 벌인 이유 역시 잡지의 근간이 된 어린이 인권 옹호와 소년회 결성 사상이 저항운동으로 발전할 소지가 충분했다고 봤기 때문으로 분석됐다.

'일제 검열에서 드러난 <어린이> 사상 특징과 시대적 임무 고찰' 논문을 쓴 경상국립대 최미선 박사는 1923년 3월 첫 발행되기 시작한 '어린이'지와 당시 조선총독부가 매월 검열 내용을 수록한 '조선출판경찰월보(월보)'를 비교 분석해 이같이 결론지었다.

2일 연구에 따르면 방정환 선생은 어린이지 창간호 발행일자를 3·1절 기미독립선언 기념일에 맞춰 잡지 발행을 조선 소년운동과 결부시키려 했지만, 일본 경찰의 검열로 1923년 3월 20일에야 첫 발행이 이뤄질 수 있었다.

지속된 일본 경찰의 검열 흔적은 어린이지에 수록된 사고(社告)란에서 엿볼 수 있다.

1926년 9월 발행된 어린이지의 사고란에는 잡지의 모회사인 '개벽'이 발행금지를 당했다는 내용이 실렸고, 1927년 12월 발행본에는 "삭제를 많이 당해 내지 못한 것이 많다"는 내용이 실렸다.

1928년 3월 발행된 어린이지에는 같은 해 신년호가 발행 뒤 매진돼 다시 인쇄를 시작하려던 때 총독부 경무국으로부터 압수 명령을 받아 경성 50여곳, 지방 300여곳 서점의 책을 모두 몰수당했다는 사정이 실렸다.

하지만 최 박사의 분석 결과 어린이지에서 삭제된 글의 내용·분량과 월보에 수록된 검열 결과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일례로 1932년 9월 발행된 어린이지 100호 기념호는 무려 26편에 달하는 글이 압수됐다.

압수된 글의 목록은 직후 마련된 어린이지 '특별호' 사고에 수록되기도 했지만, 월보에는 아동문학 매체에 대한 검열이 기록되지 않았다.

최 박사는 실제 검열 내용과 월보 기록상 차이의 이유를 일제가 내세운 검열 명분과 어린이지에 담긴 내용 간의 불일치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일제는 어린이지에 포함된 조선 어린이들의 민족적 자긍심을 고취하거나 조선의 지리 풍토적 아름다움을 강조하는 내용 등이 저항 운동적 성격을 띠고 있다고 판단해 압수·삭제했지만, 자신들이 내세운 검열의 대의명분에 부합하지 않기에 월보 기록 수록은 고의로 누락했다는 것이다.

최 박사는 일제의 가혹한 검열이 발행 3년여 만에 10만 구독자를 달성한 어린이지의 영향력과 관련이 있다고도 분석했다.

어린이지가 단순한 문예지나 정보 제공지가 아닌 민족적 소년문화 운동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고, 실제로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어린이지가 조선 소년운동을 주도했으며, 어린이날을 제정해 어린이 우대정신을 내세웠고 인내천 사상에 기반한 어린이 인권 운동을 펼친 사상운동 실천서였다"고 분석했다.

최 박사는 "방정환 선생의 와병에 대한 기사가 어린이지에 자주 실리면서 검열 내용이 점차 사라지기 시작했다"며 "총독부가 어린이지에 유독 예리한 검열의 잣대를 들이댄 것은 당시 어린이지와 방정환의 영향력 때문"이라고 밝혔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