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그래머·간호사 경험 덕에 묻힐 뻔한 '살인사건' 찾아냈죠"
“죽은 자는 말이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죽은 사람의 몸은 생전에 말로 하지 못한 이야기들을 전해주곤 하지요. 하마터면 덮일 뻔한 진실을 밝혀내기도 하고요. 프로그래머, 간호사 시절엔 경험하지 못한 이런 보람이 제가 검시조사관으로 뛰게 해주는 원동력입니다.”

김진영 서울경찰청 소속 검시조사관(45·사진)은 동료 경찰들과는 다소 다른 특이한 경력을 지니고 있다. 잘나가던 컴퓨터 프로그래머에서 대형 병원 간호사로, 몇 년 뒤엔 변사 사건을 현장에서 전문적으로 조사하는 검시조사관으로 변신했다.

9년간 경찰로 근무하면서 다룬 변사 사건만 수천여 건. 그의 직감으로 새로운 진실이 밝혀진 사건도 여럿이다. 지난달엔 그간의 공로를 인정받아 경찰청이 처음으로 뽑은 ‘베스트 조사검시관’에 선정되기도 했다.

무엇이 그를 계속 ‘변신’하게 만든 것일까. 최근 한국경제신문과 만난 김 조사관은 “제가 즐겁게 일할 수 있는 곳을 늘 찾아왔다”며 “이번에 받은 상은 전국에서 고생하는 조사관들을 대신해 받은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소감을 밝혔다.

김 조사관은 대학 시절만 해도 평범한 공학도였다. 한양대 공대를 졸업하고 삼성SDS에 취직했다. 사내에서 ‘우수 사원’으로 꼽힐 정도로 실력도 인정받았지만 자신만의 ‘전문 기술’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고민 끝에 아내와 같은 간호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사표를 냈다.

3년간 밤낮으로 공부해 국립의료원 간호대학을 졸업한 그는 이후 서울아산병원에서 근무했다. 간호사로서도 실력을 인정받아 수술실·중환자실을 주로 맡았다. 그러다 우연히 응시한 검시조사관 채용시험에 합격하면서 2012년 경찰청으로 자리를 옮겼다.

김 조사관은 “당시 병원 동료가 ‘한번 내보라’고 한 말을 듣고 서류 마감 하루 전 아내도 모르게 원서를 냈는데 덜컥 합격했다”며 “급여가 절반 가까이 줄었지만 당시 격무에 시달렸던지라 아내도 격려해줬다”고 말했다. 이어 “실제 현장에 와보니 정말 사회적으로 필요한 일이라고 느껴 지금까지 하게 됐다”고 덧붙였다.

부검을 진행하는 법의관과 달리 검시조사관은 사건 현장에서 사체를 조사해 각종 정보를 수집한다. 경찰 수사의 대략적인 방향을 정하는 나침반 역할을 하는 셈이다. 조사관들의 활약으로 묻힐 뻔한 ‘살인 사건’이 드러날 때도 종종 있다.

“당뇨 병력이 있는 여성의 변사 사건을 맡은 적이 있습니다. 시신이 이미 부패해 정확한 조사도 힘들고 병력도 있어 급사한 걸로 추정됐죠. 그런데 시신에 눌린 자국이 있는 점이 수상했어요. 성폭행 증거였죠. 수사팀을 설득해 다시 조사한 끝에 여성을 쫓던 스토킹범이 붙잡혔습니다.”

매일 4~5곳의 현장을 바쁘게 뛰는 그는 지금도 작은 변신을 준비하고 있다.

김 조사관은 “대학원에서 의료법 관련 석사학위도 취득했고 논문도 꾸준히 발표하고 있다”며 “경찰에 관심 있는 학생들을 위해 나중엔 강단에도 서 볼 계획”이라고 했다.

배태웅 기자 btu104@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