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경까지 겪은 나이 든 여성이 당한 성폭행 사건을 중심으로 우리 사회의 단면을 촘촘하게 들여다본 영화가 관객들을 찾는다.
영화 '갈매기'는 일평생 수산시장에서 일해온 오복(정애화 분)이 술자리에서 성폭행을 당한 이후 수치스럽고 당혹스러운 마음을 견디며 세상에 맞서 자신을 지키기 위한 목소리를 내는 과정을 그린다.
김미조 감독의 장편 데뷔작으로 전주국제영화제 한국경쟁부문 대상을 받았으며, 함부르크영화제, 바르샤바국제영화제 등 전 세계 유수의 영화제에 초청됐다.
영화는 결혼을 앞둔 딸의 엄마이자 남편에게 차마 사실을 털어놓지 못하는 아내, 생계가 달린 일로 얽혀있는 가해자의 동료라는 오복의 신분을 통해 중년 여성이 당한 성폭행이라는 소재를 가슴이 답답하리만큼 복잡한 상황 안에 던진다.
가해자에게 사과조차 떳떳하게 요구하지 못하는 오복의 상황은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큼 현실적이어서 더 아프게 다가온다.
김 감독은 19일 용산구 CGV 아이파크몰에서 열린 시사회 직후 간담회에서 영화 속 인물이나 사건 등이 현실적이라는 평가에 대해 시나리오를 작업하며 서지현 검사의 미투를 비롯해 대한항공 회항 사건, 노량진 수산시장 현대화 사업 갈등 등 실제 사건들을 많이 참고했다고 밝혔다.
그는 "다수에 맞서 목소리 낸 사건들을 많이 참고했다"며 "서지현 검사의 미투 사건을 타임라인대로 되짚으면서 많이 적용했다.
서지현 검사가 처음에는 사과만 하면 된다고 했는데, 그것이 이뤄지지 않으면서 사건이 계속 커져갔다.
오복도 처음에는 사과를 요구하는데 그것이 묵살되면서 일이 커진다.
은폐할수록 사건이 점점 크게 드러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성폭행 사건 외에도 영화에는 결혼을 앞두고 예단 문제로 골머리를 앓는 신부나 보상금 문제 앞에 진실을 외면하는 상인들,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지만 억울함을 호소하는 1인 시위 등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문제들이 등장한다.
영화는 '눈 딱 한 번 감고 넘어가면 될 일'이라며 피해자에게 강요되는 침묵도 꼬집는다.
오복은 분하고 억울하면서도 혹여 딸의 결혼에 피해가 갈까, 구청과 상인들의 보상금 합의를 이끄는 가해자를 지목해도 될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큰 용기를 내 경찰에 신고하지만, 증거가 없지 않냐며 적반하장인 가해자와 그를 두둔하는 동료 상인들, 왜 술을 마셨냐는 원망 섞인 딸의 말 한마디가 뒤따른다.
하지만 오복은 결코 침묵당하지 않고, 목소리를 낸다.
"이 사람, 저 사람 죄다 눈치 보면 나는 언제 챙겨?"라는 오복의 대사는 희생을 강요당하던 과거의 삶에서 벗어나 인간의 존엄성을 찾으려는 여성이자 한 사람으로서 투쟁을 대변한다.
여기에 엄마를 돕기 위해 나서는 두 딸의 연대도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김 감독은 "'깡' 있는 영화를 만들려고 했다.
거칠고 투박해도, 그 기세에서 패기가 느껴지고 두려움이 없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며 "'영자의 전성시대', '바보선언' 등 거칠지만 그 안에 에너지를 가진 70∼80년대 한국 영화를 참고했다"고 설명했다.
오복을 연기한 배우 정애화는 "가부장적인 부모와 남성 우월주의가 있는 억압된 환경에서 자란 나였다면, 빌미를 제공한 내 탓을 하며 살았을 것 같다"며 "(이랬던 내) 성격이 오복을 통해 많이 바뀌고, 성장했다.
이 부분에 있어 감사하다"고 솔직한 심정을 전했다.
또 영화는 성폭행 장면을 직접적으로 묘사하지 않는 것은 물론, 당시 상황에 대한 어떠한 설명이나 암시도 주지 않는다.
이는 김 감독이 연출에 있어 가장 많이 신경을 쓴 부분이기도 하다.
그는 "성폭행을 당한 중년 여성을 다룬다는 이유로 이를 묘사해 또 다른 피해를 안겨주지 말자고 생각했다"며 "'갈매기'는 오복이라는 인물이 얼마나 처참하게 고통당했는지가 아니라 이런 일이 일어났는데, 어떻게 극복하고 삶을 이어나가는지에 관한 이야기"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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