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길에 핀 詩…"외로운 간이역도 모두 인생역" [고두현의 문화살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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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찻길의 인문학
120년 전 첫 경인선 시속은 20㎞
당시엔 "나는 새도 못 따를 속도"
이젠 20배 더 빠른 초고속 시대
희망은 늘 한 발짝 늦게 오지만
아직 마지막 기차는 남아 있네…
고두현 논설위원
120년 전 첫 경인선 시속은 20㎞
당시엔 "나는 새도 못 따를 속도"
이젠 20배 더 빠른 초고속 시대
희망은 늘 한 발짝 늦게 오지만
아직 마지막 기차는 남아 있네…
고두현 논설위원
‘화륜거 구르는 소리는 우레와 같아 천지가 진동하고 (…) 수레 속에 앉아 영창으로 내다보니 산천초목이 모두 활동하여 닫는 것 같고, 나는 새도 미처 따르지 못하더라.’
1899년 9월 18일 국내 최초의 경인선 철도가 개통된 다음날 독립신문에 실린 시승기의 한 대목이다. 사실을 전하는 기사이지만 표현이 문학적이다. 증기기관차를 처음 접했으니 바퀴 구르는 소리가 ‘우레’ 같고, 빠르기는 ‘나는 새도 미처 따르지 못하더라’고 할 만했다.
기차가 노량진에서 인천까지 도착하는 데에 걸린 시간은 1시간30분, 평균속도는 시속 20㎞였다. 걸어서 12시간이 넘게 걸리던 것에 비하면 엄청난 ‘혁명’이었다. 최남선도 기차 속도를 새와 비교했다. 1905년 경부선 개통 뒤 그는 ‘우렁차게 토하는 기적 소리에/남대문을 등지고 떠나 나가서/빨리 부는 바람의 형세 같으니/날개 가진 새라도 못 따르겠네’(‘경부철도가’)라고 노래했다. 이때의 ‘남대문’은 지금의 서울역을 말한다. 한동안 ‘남대문정거장’으로 불리다가 1925년 원형 돔 건물이 들어서면서 경성역으로 바뀌었다. 국내 첫 양식당인 2층 그릴과 티룸(다방)까지 들어서 문학 작품의 배경에도 자주 등장했다. 이 그릴은 이상의 소설 ‘날개’에 돈이 없어도 꼭 머물고 싶은 꿈의 공간으로 나온다.
경인선과 경부선에 이어 경의선, 호남선, 경원선, 장항선, 중앙선이 잇따라 개통되면서 철도와 관련된 사연은 갈수록 늘어났다. 1937년에 개통된 수인선(수원~인천)은 폭이 좁은 협궤열차여서 더욱 많은 이야깃거리를 낳았다. ‘꼬마 열차’로 불린 수인선은 군자염전의 소금과 소래포구의 해산물을 부지런히 실어 날랐다. 소래철교 등 일부 구간에서는 갯벌과 염전이 손에 잡힐 듯 가까웠다. 그 길을 타고 통학생과 좌판 아주머니들이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오고 갔다.
신경림 시인은 ‘군자(君子)에서’라는 시에 ‘협궤열차는 서서/기적만 울리고 좀체 떠나지 못한다//승객들은 철로에 나와 앉아/봄볕에 가난을 널어 쪼이지만/염전을 쓸고 오는/바닷바람은 아직 맵차다’고 썼다. ‘석탄연기를 내뿜으며 헐떡이는/기차에 뛰어올라 숨을 몰아쉬면//나는 안다 많은 형제들의 피와 눈물이/내 등 뒤에서 이렇게 아우성이 되어/내 몸을 밀어내고 있는 것을’(전문 그래픽 참조).
이가림 시인의 ‘소금창고가 있는 풍경’에도 염전과 수차(水車)가 나온다. ‘시커먼 버팀목의 부축을 받으며/간신히 버티고 서 있는 소금창고와/버려진 장난감 놀이기구 같은 수차가/시들어가는 홍시빛 노을을/망연히 바라보고 있을 뿐/마른 뻘밭에 엎드린/나문재들의 흐느낌 소리를/엿듣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올해 탄생 100주년을 맞은 김수영 시인은 ‘간이역’이라는 시에서 외진 시골역을 인생역에 비유했다. ‘기차는 아직 오지 않았다’로 시작하는 이 시에서 그는 ‘부드러운 능선 위로/갑자기 쏟아지는 붉은빛’과 ‘지는 해가 따가운 듯/부풀어오르는 뭉게구름’을 보며 ‘한때나마 나도/누구에게 뜨거운 사람이었는가’를 자문한다. 그러면서 ‘지나간 일조차/쓰리고 아플 때에는/길 위가 편안하리라’며 다시금 ‘기차를 기다린다’고 했다.
이런 삶의 순간이 모여 역사가 된다. 120여 년 전 시속 20㎞였던 기차는 이제 20배 속도로 질주하고 있다. 빛의 속도로 달리는 광속시대에도 희망은 늘 한발짝씩 늦곤 한다. 그러나 우리 앞에는 아직 오지 않은 열차가 남아 있다. ‘여기서부터, -멀다/칸칸마다 밤이 깊은/푸른 기차를 타고/대꽃이 피는 마을까지/백 년이 걸린다’(서정춘 ‘죽편’)는 시처럼 오래 걸리더라도 ‘대꽃이 피는 마을까지’ 가는 ‘푸른 기차’가 남아 있는 한 인생은 그래도 살 만하다. 앞날이 마냥 어둡지만도 않다.
1899년 9월 18일 국내 최초의 경인선 철도가 개통된 다음날 독립신문에 실린 시승기의 한 대목이다. 사실을 전하는 기사이지만 표현이 문학적이다. 증기기관차를 처음 접했으니 바퀴 구르는 소리가 ‘우레’ 같고, 빠르기는 ‘나는 새도 미처 따르지 못하더라’고 할 만했다.
기차가 노량진에서 인천까지 도착하는 데에 걸린 시간은 1시간30분, 평균속도는 시속 20㎞였다. 걸어서 12시간이 넘게 걸리던 것에 비하면 엄청난 ‘혁명’이었다. 최남선도 기차 속도를 새와 비교했다. 1905년 경부선 개통 뒤 그는 ‘우렁차게 토하는 기적 소리에/남대문을 등지고 떠나 나가서/빨리 부는 바람의 형세 같으니/날개 가진 새라도 못 따르겠네’(‘경부철도가’)라고 노래했다. 이때의 ‘남대문’은 지금의 서울역을 말한다. 한동안 ‘남대문정거장’으로 불리다가 1925년 원형 돔 건물이 들어서면서 경성역으로 바뀌었다. 국내 첫 양식당인 2층 그릴과 티룸(다방)까지 들어서 문학 작품의 배경에도 자주 등장했다. 이 그릴은 이상의 소설 ‘날개’에 돈이 없어도 꼭 머물고 싶은 꿈의 공간으로 나온다.
경인선과 경부선에 이어 경의선, 호남선, 경원선, 장항선, 중앙선이 잇따라 개통되면서 철도와 관련된 사연은 갈수록 늘어났다. 1937년에 개통된 수인선(수원~인천)은 폭이 좁은 협궤열차여서 더욱 많은 이야깃거리를 낳았다. ‘꼬마 열차’로 불린 수인선은 군자염전의 소금과 소래포구의 해산물을 부지런히 실어 날랐다. 소래철교 등 일부 구간에서는 갯벌과 염전이 손에 잡힐 듯 가까웠다. 그 길을 타고 통학생과 좌판 아주머니들이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오고 갔다.
신경림 시인은 ‘군자(君子)에서’라는 시에 ‘협궤열차는 서서/기적만 울리고 좀체 떠나지 못한다//승객들은 철로에 나와 앉아/봄볕에 가난을 널어 쪼이지만/염전을 쓸고 오는/바닷바람은 아직 맵차다’고 썼다. ‘석탄연기를 내뿜으며 헐떡이는/기차에 뛰어올라 숨을 몰아쉬면//나는 안다 많은 형제들의 피와 눈물이/내 등 뒤에서 이렇게 아우성이 되어/내 몸을 밀어내고 있는 것을’(전문 그래픽 참조).
이가림 시인의 ‘소금창고가 있는 풍경’에도 염전과 수차(水車)가 나온다. ‘시커먼 버팀목의 부축을 받으며/간신히 버티고 서 있는 소금창고와/버려진 장난감 놀이기구 같은 수차가/시들어가는 홍시빛 노을을/망연히 바라보고 있을 뿐/마른 뻘밭에 엎드린/나문재들의 흐느낌 소리를/엿듣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올해 탄생 100주년을 맞은 김수영 시인은 ‘간이역’이라는 시에서 외진 시골역을 인생역에 비유했다. ‘기차는 아직 오지 않았다’로 시작하는 이 시에서 그는 ‘부드러운 능선 위로/갑자기 쏟아지는 붉은빛’과 ‘지는 해가 따가운 듯/부풀어오르는 뭉게구름’을 보며 ‘한때나마 나도/누구에게 뜨거운 사람이었는가’를 자문한다. 그러면서 ‘지나간 일조차/쓰리고 아플 때에는/길 위가 편안하리라’며 다시금 ‘기차를 기다린다’고 했다.
이런 삶의 순간이 모여 역사가 된다. 120여 년 전 시속 20㎞였던 기차는 이제 20배 속도로 질주하고 있다. 빛의 속도로 달리는 광속시대에도 희망은 늘 한발짝씩 늦곤 한다. 그러나 우리 앞에는 아직 오지 않은 열차가 남아 있다. ‘여기서부터, -멀다/칸칸마다 밤이 깊은/푸른 기차를 타고/대꽃이 피는 마을까지/백 년이 걸린다’(서정춘 ‘죽편’)는 시처럼 오래 걸리더라도 ‘대꽃이 피는 마을까지’ 가는 ‘푸른 기차’가 남아 있는 한 인생은 그래도 살 만하다. 앞날이 마냥 어둡지만도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