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BBC의 굴욕
세계 최초의 공영방송인 영국 BBC는 해마다 불우아동돕기 자선 방송을 내보낸다. 시청자가 전화로 참여하는 생방송 프로그램이다. 그런데 전화가 걸려오지 않거나 퀴즈 당첨자가 나오지 않을 경우 제작진을 출연시켜 시청자인 양 속인 사실이 2007년 발각됐다.

그 직전에는 엘리자베스 여왕 다큐멘터리 조작 사건이 불거졌다. 여왕이 “왕관을 벗어달라”는 사진작가의 요구에 기분이 상해 일정을 취소하고 자리를 떠버린 것으로 묘사된 예고편을 보고 왕실이 문제를 제기하자 BBC는 편집 잘못을 뒤늦게 인정했다. 당시 BBC 사장 마크 톰슨은 “시청자를 속일 것인지, 프로그램을 포기할 것인지 선택하라면 프로그램을 포기하겠다”며 공식 사과했다.

1927년 출범한 BBC는 오랫동안 신뢰성과 공정성을 앞세워 시청자의 사랑을 받았다. 2차 세계대전 발발을 가장 먼저 알리고, 자국 이익과 상충하는 현안도 객관적으로 전했다. 1982년 영국과 아르헨티나 간의 포클랜드전쟁 때 자국 군대를 ‘국군’이 아니라 ‘영국군’으로 불렀을 정도다. 이런 전통은 인터뷰와 다큐멘터리 분야로 이어졌다.

그러나 또 다른 오점이 최근 드러났다. 26년 전 젊은 기자가 다이애나 왕세자빈을 인터뷰하기 위해 위조한 은행 거래 내역을 들이밀고 거짓말까지 한 사실이 밝혀졌다. 이에 영국 정부가 가구당 연간 159파운드(약 25만원)인 수신료를 동결하거나 삭감하는 등의 강력한 쇄신을 요구하고 나섰다. 하원은 청문회까지 준비하고 있다.

정치 편향성 논란도 거론되고 있다. 보리스 존슨 총리가 이끄는 보수당 정부는 “2015년 총선 당시 BBC의 친(親)노동당 행보가 도를 넘었으며, 2019년 선거 땐 존슨이 출연 자체를 거부할 정도로 편향성이 심했다”고 지적했다. 2012년에는 보수당의 마거릿 대처 전 총리 측근이 과거에 아동 성범죄를 저질렀다고 보도했다가 사실무근으로 판명돼 BBC 사장이 사퇴하기도 했다.

이번 사건으로 100년 가까운 BBC의 역사와 위상이 돌이키기 어려울 정도로 구겨졌다. 나아가 공영방송이 신뢰성과 공정성, 정치적 균형을 잃으면 어떻게 되는지도 확인됐다. 우리는 어떤가. 지난 주말 열린 KBS 수신료 관련 국민토론회에선 “정권 따라 흔들리지 않고 국민 신뢰를 회복할 방안을 시급히 마련해야 한다”는 시민들의 주문이 쇄도했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