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플레와 전쟁·금융규제 수위…폴 볼커가 남긴 '두 가지 숙제'
지난 8일(현지시간) 향년 92세로 작고한 폴 볼커 전 미국 중앙은행(Fed) 의장(사진)은 “20세기 전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중앙은행 총재”(독일 경제학자 헨리 카우프만)로 평가받는다. 미국뿐 아니라 세계 경제학계에서도 그가 실물경제 및 경제학 자체에 큰 영향을 끼쳤다며 추모하고 있다.

키가 2m에 이르고 담배를 좋아했던 그는 크게 두 가지로 명성을 얻었다. 첫 번째는 ‘인플레이션 파이터’로서다. 오일쇼크로 미국 물가가 13%까지 치솟았던 1979년 Fed 의장에 오른 볼커는 기준금리를 최고 연 20%대까지 끌어올렸다. 재선을 향해 뛰던 당시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과 충돌했지만, 그는 고금리를 밀어붙여 결국 1983년 물가를 3.2%까지 내리는 데 성공했다. 이는 향후 이어진 장기 호황의 토대가 됐다는 평가다.

두 번째는 ‘볼커룰’이다. 2008년 금융위기 와중에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백악관 경제회복자문위원회(ERAB) 의장으로 발탁된 그는 은행의 신뢰 회복을 위해 ‘볼커룰’ 제정을 주도했다. 금융위기의 원흉으로 지목된 대형은행들의 위험 투자를 제한하는 것으로, 2010년 발효된 ‘도드-프랭크법’이 핵심이다.

미 경제학계는 미 경제가 여전히 볼커의 유산 속에 놓여 있다고 진단한다. 실업률이 50년 만에 최저인 3.5%(11월)까지 떨어졌지만 인플레이션은 여전히 문제가 되지 않는다. 실업률이 떨어지면 임금(물가)이 오를 것이란 ‘필립스곡선’이 작동하지 않는 상황이다. 경제학계는 그 이유에 대해 아직 정확하게 결론을 내지 못하고 있다. 다만 세계화와 아마존 등이 불러온 유통혁명을 원인으로 짐작할 뿐이다. 제롬 파월 현 Fed 의장은 “실업과 물가가 동시에 낮은 것은 이례적이며 일시적 현상”이라고 분석하기도 했다.

볼커룰을 중심으로 한 금융규제는 여전히 논란이다. 위기 재발을 막기 위해 다소 강화된 금융규제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있는 반면, 과도한 규제는 부작용을 낳는다는 지적도 만만치 않다. 특히 민주당의 대선 주자인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은 규제 완화가 다시 위기를 부를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반해 규제 완화론자들은 볼커룰 때문에 미 지방은행이 몰락하고 JP모간, 뱅크오브아메리카, 웰스파고 등 거대 은행의 독과점이 오히려 강화됐다고 주장한다. 최근 문제가 된 레포(환매조건부채권) 시장의 금리 급등도 지나친 자기자본 규제로 주요 은행이 돈을 풀지 않고 있는 탓으로 분석되고 있다.

인플레와 전쟁·금융규제 수위…폴 볼커가 남긴 '두 가지 숙제'
인플레와의 투쟁, 금융 규제의 적정 수위 등 볼커가 고민했던 문제는 미국뿐 아니라 세계 경제의 영원한 숙제다. 그는 그런 과제를 남겨놓고 영면에 들어갔다.

뉴욕=김현석 realis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