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식 후 귀갓길에 당한 교통사고는 산업재해보상보험(산재)이 정한 업무상 재해로 인정받을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정답은 ‘그렇다’이다. 지난 4월 서울행정법원은 노동자 A씨가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낸 이 같은 내용의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했다. 사장이 주재한 회식에 참석했던 A씨는 다른 동료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귀가하다 사고를 당했다. A씨는 ‘업무상 재해’라고 주장했지만 공단은 ‘원해서 간 회식이 아니었느냐’며 산재 보험금 지급을 거절했다. A씨는 “사장 주재 회식이었던 만큼 업무의 연장”이라며 공단을 상대로 소송했다. 법원은 업무상 회식이라는 점, 회식 후 귀가는 출퇴근 사고와 동일하다는 점에서 A씨의 손을 들어줬다.

이번 법원 판결처럼 회식도 이제는 업무로 인정받는 분위기다. 아무리 업무의 연장이라곤 하지만 ‘윗사람’ 눈치 보는 회식은 가능하면 빠지고 싶은 게 김과장 이대리들의 솔직한 심정이다. 직장인을 상대로 한 여론조사에서도 회식 기피 현상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지난 연말 여론조사업체 리얼미터가 직장인 남녀 501명을 대상으로 ‘송년회를 어떻게 했으면 좋겠나’라고 질문한 결과 ‘식사와 음주를 곁들인 회식을 원한다’는 응답은 8.4%에 불과했다. ‘점심·저녁 식사를 간소하게 하자’는 의견이 74.4%로 압도적이었다. ‘하지 말자’는 의견도 12.5%에 달했다.

우리 김과장 이대리들은 어떻게 원치 않는 회식 자리를 거절하는지 알아봤다. 자신이 속한 조직에서 ‘미운털’이 박히지 않으면서도 회식을 피할 수 있는 ‘거절의 기술’을 가진 숨은 고수가 많았다. 이들의 내공을 네 단계로 정리했다.
[김과장 & 이대리] 원치않는 회식 피하기…술자리 거절의 기술
입문=가족을 최대한 활용하라

한 유통회사에 다니는 김 과장(38)은 최근 한 달 새 있었던 두 차례의 회식을 모두 빠졌다. 아이가 둘 생기면서 혼자 육아를 책임지고 있는 아내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다. 당연히 회식을 거절하는 주된 이유도 ‘육아’다. ‘아이가 갑작스럽게 열이 나 병원에 데리고 가야 한다’는 등이 단골 멘트다.

김 과장이 아이 핑계로 회식을 쉽게 거절할 수 있는 건 사내 분위기와도 무관치 않다. 이 회사는 아빠가 된 남성 직원들에게 한 달간 육아휴직을 줄 만큼 일과 가정의 양립에 신경을 쓰고 있다. “아이가 OO해서…”란 이유를 말하면 상사들도 핑계인 줄 의심하면서도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통신사에 다니는 유 대리(32)는 머릿속에 항상 가정 대소사를 외우고 다닌다. 예전에 써먹었던 핑계들과 시일이 너무 겹치지 않도록 부모님 생신, 남편 생일, 제사 등 핑곗거리를 적절히 준비해 둔다. 윗사람으로부터 갑작스러운 회식을 제안받을 때 못 가는 이유를 ‘바로’ 얘기해야 거짓말처럼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유 대리는 “조금만 우물쭈물해도 ‘핑계 대는 거지?’라는 말을 들으며 원치 않은 회식에 끌려가기 쉽다”고 말했다.

초보=첫 회식이 중요하다

대기업에 다니다 대학교 교직원으로 이직한 김 주임(33)은 입사 첫날부터 이미지를 제대로 잡았다. 이전 회사에서 술 잘 먹는 사람으로 낙인찍혀 온갖 술자리에 불려다닌 기억 때문이다. ‘술대리’로 불리던 김 주임은 현재 몸담은 곳에서는 알코올 분해효소가 없어 한 잔만 마셔도 온몸이 빨개지는 ‘약골’로 불린다. 김 주임은 “대학에선 철저하게 술을 못 마시는 사람처럼 연기하고 있다”며 “술이 마시고 싶을 땐 친구들을 부르거나 집에서 혼술을 한다”고 말했다.

시중은행에 다니는 김 계장(30)에겐 특별한 거절의 기술이 없는 게 기술이다. 굳이 기술이라면 ‘단호함’이다. 본사에서 고위 임원이 지점을 방문해 마련한 회식에도 눈 딱 감고 빠졌다. 처음에는 눈치를 주는 선배도 있었지만 소문이 퍼지면서 으레 회식에는 안 가는 후배로 자리잡았다. 김 계장은 “술을 잘 못 해 회식에 참여하면 다음날 업무 효율이 떨어지고, 애초에 상사 비위를 맞추는 성격도 못 된다”며 “회식에 참여하지 않아도 업무를 확실히 처리하니 지점장도 크게 나무라지 않는다”고 말했다.

중급=술 안 마실 방법을 찾아라

공기업에 다니는 성 대리(31)는 회식이 있는 날이면 일부러 차를 끌고 출근한다. 그러고는 상사 전용 운전기사를 자처한다. 평소 음주를 즐기지 않는 그는 술잔이 쉴 틈 없이 도는 회식 자리에서 “부장님 취하시면 제가 집에 모셔다드려야죠”라며 술은 입에 대지 않는다. 회식 초반에는 강권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관심 밖이 되기 일쑤다. 회식이 끝나면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상사들을 자기 차에 태워 집에 데려다준다. 그는 “그렇게 눈치 주던 상사들도 내릴 때면 ‘수고했다’며 어깨를 툭툭 치면서 집에 들어간다”고 말했다.

‘아프다’는 진부한 핑계가 먹힐 때도 있다. 서울의 한 건설사에 다니는 정 매니저(34)는 회사에서도 대놓고 약을 먹는다. 초기이긴 하지만 허리디스크에다 경미한 지방간을 앓고 있다. 약을 장기 복용하는 그를 보고 직장 동료들은 ‘걸어다니는 종합병원’으로 부른다. 정 매니저는 회식을 하러 가더라도 폭탄주 ‘세례’는 피해갈 수 있다. 건강을 걱정한 동료들로부터 소맥(소주와 맥주)은 마시지 않을 수 있는 ‘면책권’을 부여받았기 때문이다.

고수=동료와 협업하라

무역회사에 다니는 김 대리(33)는 정말 가고 싶지 않은 회식 자리에 가야 할 땐 다른 회사 친구와 ‘협업’을 한다. 회식에 참석해 눈도장을 찍고 나면 그 친구가 급한 일이 생긴 것처럼 회식 초반에 전화를 해 준다. 전화번호부에 저장한 이름도 가족이나 거래처처럼 교묘하게 바꿔 놓는다.

아예 스마트폰 앱(응용프로그램)을 이용할 수도 있다. 특정 시간에 정해진 이름으로 전화가 오게 하는 기능이 있는 앱이다. 김 대리는 “시간은 정확하지만 상대가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티가 나지 않게 연기를 잘해야 한다”고 귀띔했다.

다른 중견 건설사에 재직 중인 오 대리(34)는 같은 부서 선배 세 명과 함께 순번을 정해서 회식에 불참한다. 한 명이 핑계를 대고 빠지면 다른 사람들이 “이번에 정말 어쩔 수 없는 사정이더라”며 소위 방패막이가 돼주는 것이다. 부장과의 점심 식사 때부터 일부러 “김 대리 오늘 집에 급한 일 있다면서”라고 먼저 운을 띄워주기도 한다.

박종필 기자 j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