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임기자 칼럼] 김구의 길, 김원봉의 길
3·1운동을 계기로 국내외 독립운동가들이 힘을 모아 상하이에서 수립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초기부터 순탄치 않았다. 일제의 방해와 공격뿐만 아니라 내부 갈등이 끊이지 않아서였다. 민족주의와 사회주의(공산주의)가 대립했고, 독립을 위한 방법을 놓고도 외교론과 실력양성론, 무장투쟁론이 맞섰다.

특히 민족주의와 공산주의의 갈등이 심했다.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임시정부 직원 중에도 민족주의니 공산주의니 하여 음으로 양으로 투쟁이 개시되었다”며 “국무총리 이동휘가 공산혁명을 부르짖고 대통령 이승만은 데모크라시를 주장하여 국무회의 석상에서도 대립과 충돌을 보는 기괴한 현상이 층생첩출(層生疊出·거듭 일어남)하였다”고 토로했다. 미국에 머물던 이승만이 1921년 1월 상하이에 부임하자 이동휘는 바로 다음달 총리직을 사임했고, 이승만도 4개월 만에 미국으로 돌아갔다.

임시정부와 갈등했던 공산주의

거듭된 내부 갈등은 임정의 존립을 위협했다. 1923년 60여 개 단체 대표 113명이 국민대표회의를 열고 통합전선을 모색했다. 그러나 임정을 폐지하고 새로운 조직을 만들자는 공산계열의 ‘창조론’과 기존 정부를 유지한 채 부분적으로 구조를 바꾸자는 상하이파의 개조론으로 갈라져 싸우다 끝났다. 1935년 7월 ‘5당 통일회의’를 통해 의열단, 신한독립당, 조선혁명당, 한국독립당, 미주한인독립단이 합쳐 조선민족혁명당이 탄생했으나 좌파단체의 이탈로 끝내 파국을 맞았다. 오히려 약산 김원봉 등이 주도하는 임정 무용론과 해체운동이 더 극렬해졌다. 백범은 “민족혁명당이 분열된 원인은 의열단 분자가 민족운동의 가면을 쓰고 속으로는 공산주의를 실행하기 때문”이라고 비판했다.

백범은 공산주의에 대한 불신을 거듭 천명했다. 1920년대 공산혁명운동을 함께하자는 이동휘의 제안에 백범은 제3국제공산당(코민테른)의 지휘와 명령을 안 받고도 할 수 있느냐며 거부했다. ‘붉은 무리’(공산당)들이 민족주의 단체들을 교란, 분열시킨다고도 했다. 중경 임정 시절인 1940년, 백범이 좌우를 망라한 5당 통일을 이뤘을 때도 김원봉이 이끄는 좌파 민족혁명당의 돌연한 이탈로 민족진영의 3당만 통합하게 됐다. 이렇게 3당 통일로 재탄생한 한국독립당을 중심으로 임정은 조직과 체제를 정비해 나갔고, 광복군을 창설했다.

서훈 여부는 공과 검토 후 신중히

무장투쟁 조직인 김원봉의 조선의용대 100여 명이 광복군에 편입된 것은 1942년 일이다. 의용대 병력 대부분이 중국 공산당의 본거지인 화북지방의 연안으로 이탈한 데다 중국 국민당 지원마저 끊겨 존폐의 기로에 선 뒤였다. 문재인 대통령의 현충일 추념사는 그래서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 “일본이 항복하기까지 마지막 5년, 임시정부는 중국 충칭에서 좌우합작을 이뤘고, 광복군을 창설했다”는 말은 선후가 바뀐 것이다. “약산 김원봉 선생이 이끌던 조선의용대가 편입돼 마침내 민족의 독립운동역량을 집결했다”는 것도 과장된 느낌이다.

김원봉은 적어도 30대 이후로는 공산주의자였다. 그렇다고 의열단, 조선의용대를 이끌고 펼친 무장투쟁의 위국헌신을 폄하해서도 안 되지만 그에 대한 독립유공자 서훈 여부는 성급하게 정할 일이 아니다. 대한민국은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자유민주주의 국가다. 독립운동의 전 과정과 월북 후 북한에서의 활동 등 전 생애를 살펴서 공과를 가려야 함은 물론이다. 극적인 요소와 픽션이 가미된 영화나 드라마가 주는 감동이나 여론조사, 청와대 국민청원 등으로 서훈 여부를 정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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