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불광동에 사는 진모씨(53)는 이번 설을 앞두고 남편에게 “앞으로 당신 동생들을 도련님이라 부르지 않겠다”고 선언했다가 남편인 이모씨(54)에게 “쓸데없는 소리”라는 핀잔을 들었다. 진씨는 하지만 “남편은 내 동생을 처남이라고 낮춰부르는데 나는 열 살 이상 어린 남편 동생을 도련님이라고 높이는 것이 비합리적”이라고 토로했다.

설 명절은 온 가족이 모여 정을 나누는 자리인 동시에 가정 내 갈등이 터져나오는 시기이기도 하다. 특히 본가·시댁과 처가·친정을 둘러싼 다툼은 ‘명절의 고전’이다. 이번 설(4~6일)에는 도련님·아가씨 등 가족 호칭이 화두가 됐다. 정부가 오는 22일까지 ‘가족 호칭에 대한 국민생각 조사’에 나서고 공청회를 준비하는 등 성평등 호칭을 두고 사회적 관심이 커진 까닭이다.
"도련님 호칭 성차별" vs "단순한 관습일 뿐"
불평등한 위계 상징 VS 단순한 호칭

결혼 3년차 직장인 고은정 씨(30·여)는 각종 용어와 호칭에서 ‘시댁’과 ‘친정’의 위계가 드러난다고 지적했다. 고씨는 “단어가 모든 걸 바꾼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언어가 인식에 영향을 미치는 것 또한 사실”이라며 “인식이 바뀌면서 자연스레 언어가 바뀌면 좋겠지만 그게 더디다면 언어부터 바꿀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직장인 송현수 씨(33·남)는 “가족 호칭에 문제의식을 느끼면서 ‘여대생’ ‘여교사’ 같은 차별 호칭도 섬세하게 생각해보게 됐다”며 “도련님, 아가씨 등은 젊은 층 사이에선 이미 어른들 앞에서나 쓰는 사어(死語)”라고 말했다.

오래된 언어 습관인 만큼 반발도 만만찮다. 호칭은 호칭일 뿐 사회적으로 굳어진 관습을 인위적으로 바꾸려는 시도에 거부감을 느끼는 것이다. 강원 원주시에 사는 이모씨(58·남)는 “부모님 부양, 제사, 집안 대소사에 딸보다 아들이 더 많은 관심과 수고를 기울이지 않느냐”며 “아들이 많은 짐을 지는 문화 자체를 바꾸든지 그렇지 않다면 어느 정도 아들을 대우해주는 문화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부산에 사는 이모씨(67·여) 역시 “도련님, 아가씨가 어감이 예쁜데 굳이 바꿔야 하느냐”며 “성평등이라면 처남, 처제를 도련님, 아가씨로 바꾸면 될 것 아니냐”고 되물었다.

“가부장제 문화 돌아볼 기회로”

다만 호칭에 문제의식을 지닌 쪽도 현실성 있는 대체어가 마땅찮다는 점을 고민으로 꼽았다. 여성가족부가 예시로 내놓은 ‘부남’ ‘부제’는 입에 붙지 않는다는 게 중론이다. 편하게 이름을 부르자는 의견이 많지만 이 역시 어색하다며 거부감을 느끼는 집안이 적지 않다.

결혼 4년차 정다은 씨(32·여)는 시댁이 보수적인 집안이 아닌데도 호칭을 바꾸자는 얘기를 꺼내는 게 부담스럽고 눈치보인다고 했다. 정씨는 “남편 가족들과 어색한 분위기를 만들고 싶지 않다”며 “용기를 내서 (남편 여동생의) 이름을 부르면 어떨지 물어보니 어른들이 ‘가족 같지 않고 남 같다’며 싫어하셨다”고 털어놨다.

도련님, 아가씨뿐 아니라 조부모와 외조부모를 구별하는 호칭 역시 문제라는 지적도 적지 않다. 이번 기회를 통해 가부장제 문화 전반을 돌아보는 계기를 마련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김종현 씨(27·남)는 “명절에 친가를 먼저 가거나 여자만 제사 음식을 차리는 등 불평등한 관습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고민해봤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현진/정의진/이인혁 기자 appl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