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철강 조선 원자력 …. 한국의 현재를 만든 세계 최고 기술력을 자랑하는 분야가 정작 대학 현장에서 외면받고 있습니다.”

31일 4년간의 임기를 마치고 평교수로 돌아가는 이건우 서울대 공대 학장(기계항공공학부 교수·사진)의 얼굴엔 걱정이 가득했다. 반도체 대국 한국에 반도체 연구자는 씨가 말라가고 있다. 반도체 분야 정부 연구개발(R&D)이 없다시피 되면서 한국 반도체 교육의 산실인 서울대 반도체공동연구소 연구실은 절반이 빈자리다. 이 학장은 “세계 1위 분야에 구태여 정부 R&D 자금을 투자할 필요가 없다는 기조가 계속되면서 10년 새 연구자 수가 반 토막이 났다”며 “원자력공학이나 조선공학 등 지난 수십 년에 걸쳐 이룩한 세계 최고 수준 학과들의 사정도 마찬가지”라고 털어놨다.

이 학장은 “분명 연구에도 유행이란 게 있고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려는 노력은 필요하다”면서도 “그럼에도 연구가 지나치게 유행을 타선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인공지능, 빅데이터, 사물인터넷 등 4차 산업혁명 분야가 각광받는 시대에도 반도체 등 오래된 분야에 투자를 게을리해선 안 된다는 지적이다.

이 학장은 2004년 아시아인으론 최초로 자동설계(CAD) 분야 국제학술지 CAD저널 편집장에 오른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연구자다. 가발 전문업체 하이모의 대표 기술인 ‘3D 스캐너시스템’이 그의 작품이다. 교수 신분으로 두 차례 창업한 대표적인 1세대 교수창업자로 꼽힌다.

그는 혁신의 종류는 하나가 아님을 강조했다. “극한까지 올라온 기술을 한 번 더 업그레이드하는 것은 고통스럽지만 1등이 되기 위해 필요한 과정”이라며 중국의 드론(무인 항공기) 업체 DJI를 예로 들었다. 그는 “DJI는 인공지능 같은 차세대 연구뿐 아니라 프로펠러의 추력을 향상시키거나 기체 강도를 높이는 연구에도 막대한 인력을 투입한다”며 “오래된 분야에서의 혁신이 DJI를 부동의 세계 1위로 만들어준 힘”이라고 설명했다.

이 학장은 2015년 발간돼 큰 반향을 일으킨 ‘공대백서’를 내놓은 주역이다. 서울대 교수들이 홈런(실패 확률이 높은 어려운 연구)을 치려는 노력보다 1루 진출(단기 성과, 논문 수 채우기)에만 급급했다는 게 당시 백서를 펴낸 공대 연구진의 결론이었다.

백서 발간 이후 2년간의 성과에 대해 이 학장은 “아직은 절반의 성공”이라고 평했다. 서울대 공대는 2016년부터 매년 세 명의 연구자에게 3000만원씩 10년간 연구를 지원하는 ‘한우물 파서 홈런 치기’ 프로젝트를 해오고 있다. 이 학장은 “교수들 스스로 문제의식을 갖고 모험적 연구에 뛰어드는 분위기를 조성한 건 백서가 남긴 큰 성과”라면서도 “교수들이 단기 성과에 급급할 수밖에 없게 하는 경직적인 교원 평가 체계를 바꾸지 못한 건 아쉬움으로 남는다”고 말했다.

이 학장의 임기 4년 중 산학협력은 빼놓을 수 없는 과제였다. 2013년 학장직에 오른 그는 모토로 ‘실사구시’를 내걸었다. “대학이 논문을 위한 논문만을 양산하는 상아탑에 머물러선 살아남을 수 없다”는 지론에서다.

서울대 공대 교수진이 중소중견기업의 기술적 애로사항을 해결해주는 산학협력중개소인 ‘공학컨설팅센터’와 국내 최초 공학 MBA인 ‘공학전문대학원’이 그의 대표작이다.

이 학장은 “대학과 산업 현장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 뛴 4년이었다”며 “평교수 자리에서도 대학의 변화를 위한 고민을 계속할 것”이라고 소회를 밝혔다.

황정환 기자 j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