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칼럼] 선의(善意)로 포장된 정책과 '폭탄 고지서'
일본 정부는 1963년 이케다 하야토 총리 당시 흥미로운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100세 생일을 맞이한 노인에게 순은으로 된 사케(쌀로 빚은 일본 전통술) 잔을 보내기로 한 것이다.

목숨 수(壽)에 해당하는 한자의 약자가 새겨져 있는 이 사케 잔은 ‘사카즈키’라 불리는 잔으로서 축복과 장수의 의미를 모두 포함하는 은잔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100세가 넘은 노인은 153명이었다. 그로부터 53년이 지난 2016년, 100세 생일을 맞은 일본 국민은 3만2400여 명이 됐고 100세 이상 인구는 6만5000여 명으로 늘어났다.

그 사이 귀금속 시세가 오르다 보니 사케 잔 하나당 우리 돈으로 8만원 정도가 소요되면서 전체 예산이 26억원 가까이 되는 상황이 됐다. 결국 일본 정부는 2015년부터 해당 프로그램에 대한 대안과 예산 삭감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일부에서는 폐지를 주장하기도 했지만 우리나라 식의 표현으로 하면 ‘미풍양속을 일시에 폐지하기 힘들다 보니’ 결국 주석에 은 도금한 사케 잔으로 대체하면서 예산을 반 정도로 줄이기로 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 축하 잔 보내는 데 우리 돈으로 여전히 12억원이 넘는 예산이 소요되고 있다.

일본 정부 예산은 흔히 ‘악어의 입’으로 상징된다. 약 50조엔을 걷으면서(세입) 100조엔 가까운 지출(세출)을 하는 것이 일본의 현행 재정구조다. 1990년에 약 60조엔을 걷고 70조엔 정도를 지출할 때만 해도 차이는 10조엔 정도였지만 지금은 그 차이가 50조엔 수준으로 벌어졌다. 세입 50조엔 중에서 국채 이자로만 약 23조엔이 지출되고 있다. 원금은커녕 이자를 갚는 데만 세입의 반 정도가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늘어나는 노령 인구로 인해 복지 보건 관련 예산은 자꾸만 늘어나 30조엔 넘는 돈이 이 분야에 사용되고 있다. 급속한 노령화의 진전이 세출을 늘리고 세입을 줄이면서 재정 악화의 주범이 되고 있다.

전체 세출에 비해 얼마 안 되더라도 세출을 줄이려면 크고 작고를 가리지 않고 가능한 한 최대로 줄여야 한다. 바다 건너 일본에서 과거에 좋은 뜻으로 도입한 프로그램이 시간이 지나며 골칫거리가 되고 있는 현실을 보며 우리의 모습을 다시 한 번 떠올리게 된다.

좋은 뜻으로 추경을 편성하고 빚을 탕감해 주고 공무원 숫자를 늘리겠다고 하는데 문제만 삼기는 힘들다.

더구나 공무원이 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나 부채 탕감 대상으로 고려되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반대의 목소리는 ‘좋은 뜻에 반대하는 나쁜 ×들’로 치부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럴수록 이런 조치 이후에 기다리고 있는 ‘고지서’들이 어떤지 확실히 고려해야 한다.

현재 시점에서 볼 때 약 120만 명에 달하는 공무원과 군인에게 퇴직 후 지급해야 할 연금 관련 부채만 750조원 정도다. 공무원 숫자 늘리기가 겁이 나는 상황이다.

부채 탕감도 그렇다. 당사자에게는 정말 좋은 일이다. 하지만 당사자가 아닌 제3자가 이 사실을 확인하게 되면 빚 갚는 의무를 소홀히 여길 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얘기는 좀 달라진다. 대규모 부채 탕감 조치가 한 번 취해지면 이는 선례가 될 가능성이 높다.

아무리 ‘이번 한 번만’이라고 외쳐도 시간이 지나면 ‘나는 왜 안 되냐’는 요구가 나올 것이다. 굳이 도덕적 해이라는 단어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금융시스템에 타격이 될 가능성이 높다.

국가경쟁력을 높이고 각종 규제를 완화하면서 새로운 먹거리를 창출하는 일은 오래 걸리고 힘이 들고 표시가 금방 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당장 표시가 나는 프로그램을 ‘좋은 뜻’을 가지고 도입하면 칭찬도 따라오고 박수 소리도 커진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고 상황이 변하면서 쓸 곳은 더 많아지고 걷는 돈은 줄어들 때 지금의 ‘좋은 뜻’은 폭탄 같은 고지서가 돼 날아올 수 있다.

한국 경제에 일대 변혁이 예상되는 현 상황에서 ‘좋은 뜻’과 ‘고지서’를 동시에 고려할 수 있는 혜안이 절실한 시점이다.

윤창현 < 서울시립대 교수·공적자금관리위 민간위원장 chyun3344@daum.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