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편소설로 돌아온 성석제 "문학이 나아가야 할 곳, 여전히 사람 속에 있죠"
소설가 성석제에겐 ‘이 시대의 이야기꾼’이란 별칭이 따라붙는다. 그는 나뭇잎 한 장에 다 적을 수 있을 만큼 짧은 분량인 ‘엽편(葉篇)소설’을 자신의 고유한 문학적 장르로 굳혀왔다.

엽편소설로 돌아온 성석제 "문학이 나아가야 할 곳, 여전히 사람 속에 있죠"
《사랑하는, 너무도 사랑하는》(문학동네)은 성 작가의 장기를 마음껏 발휘한 엽편소설집이다. 소설집을 펼치면 3~6쪽 분량의 단편 55편이 빼곡히 담겨 있다. 소설 속 그의 능청과 입담에 빠져 깔깔대며 웃다가도 마음을 툭 건드리는 주제에 금세 울컥해진다.

“이야기라는 인간세의 보석에 나는 언제나 홀려 있다”는 작가의 말처럼 그의 주된 이야기 소재는 ‘복닥거리는 인간사’다. ‘인간의 예의’ 편에 등장하는 주인장은 방문객에게 권하지도 않고 혼자 포도 몇 송이를 게걸스럽게 모두 먹고선 옆에 앉은 이에게 “거 방귀 좀 고만 뀔 수 없어?…사람이 예의가 없어”라며 면박을 준다. ‘어른의 말씀’ 편에선 몰래 절 안까지 차를 끌고 들어갔다가 나온 일행이 매표소 앞 남자에게 “사람이 어째 그래요!”라며 ‘준엄한 질책’을 당한다. 그의 소설에서만 맛볼 수 있는 삶의 소소한 순간에 대한 서사는 해학적이면서도 무게 있게 다가온다. 그의 엽편소설집인 《그곳에는 어처구니들이 산다》와 《번쩍하는 황홀한 순간》의 개정판을 신간과 함께 출간한 성 작가를 16일 서울 연희문학창작촌에서 만났다.

▷엽편소설을 쓰게 된 계기가 있나요.

문학동네 제공
문학동네 제공
“1994년 제 첫 소설집인 《그곳에는 어처구니들이 산다》를 냈을 때 ‘내가 소설을 썼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시를 쓰는 와중에 생긴 부산물을 모아서 책을 낸다는 기분이었죠. 출판사에서 마케팅을 잘해서 그 책에 ‘소설’이라고 이름 붙여줬습니다. 소설집을 낸 다음해에 출판사로부터 다음 소설을 써달라는 청탁을 받았습니다.”

▷짧은 소설의 매력은 무엇인가요.

“압축, 상징, 함축 같은 것들은 시에서 동원하는 기술입니다. 소설은 이야기이기 때문에 압축해 버리면 뜯어먹을 살이 없어져요. 그 중간쯤에 있는 게 짧은 소설입니다. 시를 소설화한 것이죠. 소설가로 데뷔하기 전에도 시적 함축성을 가진 소설을 좋아했습니다. 문학적 고향이 시라는 것도 관련이 있겠죠. 첫 창작의 경험이 시입니다. 내 손으로 처음 의미있는 무언가를 만들었을 때 느낌은 한용운의 시처럼 첫 키스의 짜릿함과 버금갔어요. 그 느낌에 아직도 휘둘리고 있습니다.”

▷첫 소설집을 낸 지 23년이 흘렀습니다. 초기 소설보다 이야기가 좀 더 묵직해진 것 같습니다.

“옛날엔 나만의 재기로 계획하지 않고 단숨에 써 내려갔죠. 그러지 않으면 소설의 맛이 나지 않았어요. 시간이 지나니 여러 가지를 생각하며 쓰게 됐습니다. 제가 지향하는 바와 독자들의 반응까지도. 그러다 보니 조금 느려졌어요. 느려진 대신 제 소설이 읽은 사람들에게 오래 머물러 있길 바랍니다.”

▷제목을 ‘사랑하는, 너무도 사랑하는’으로 지은 이유가 있나요.

“니체의 철학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을 패러디했어요. 무엇을 사랑하냐 하면, 그 대상은 인간입니다. 인간이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의 한순간, 우주의 한구석, 장소와 시간, 어떤 상황, 사람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을 너무도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23년간 한 해 평균 한 권의 책을 냈습니다. 어디에서 글감을 얻나요.

“써달라는 사람이 계속 있었으니까 가능했습니다. 공급과 수요의 논리대로 말이죠. 일상에서 재밌는 개인의 어록을 들으면 기록하고 싶어져요. 들려오는 재밌는 얘기들을 혼자만 알고 있기에는 미안한 생각이 듭니다. ‘마감 시간이 다가오는데 쓸 게 없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어딘가에 이야기 랜선 같은 게 꽂혀 있는 것 같습니다. 무선 수신기가 있든지.(웃음) 눈이 내리듯 이야기가 쌓이는 기분입니다. 청탁이 오고 글을 쓸 때가 되면 그중 하나를 찾아내면 됩니다.”

▷이번 소설집엔 ‘쉬어야만 하는 이유’ ‘길 위에서 잠들다’ 등 ‘쉼표’에 대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옛날에는 외환 딜러 정도나 돼야 바쁜 사람으로 신문에 소개도 됐는데 요샌 모두가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것 같습니다. 휴가를 가도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지 못하고 뉴스에 촉각을 기울여야 하니까요. 사람들이 본인이 꾸려온 방식과 전혀 다른 식의 일상을 보내면서 쉬었으면 좋겠습니다.”

▷꾸준히 사랑받는 인기 비결은 뭐라고 생각합니까.

“시는 선언 같은 것입니다. 사람들이 시인의 외침을 몰라준다 해도 큰 상관이 없어요. 하지만 소설은 대화입니다. 당대의 언어와 개연성을 가지고 독자에게 말을 거는 것입니다. 그래서 작가는 항상 예민하게 촉각을 곤두세우고 독자들이 좋아할 만한 글을 쓰려고 노력합니다. 그래도 틀린 경우가 참 많아요. 의도대로 항상 되지는 않아요.”

▷‘성석제 소설’만의 특징이 있습니까.

“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수집해 소설의 재료로 씁니다. 그런데 이제 사람들의 이야기를 원재료로 삼는 문학은 예전의 문학이 돼버렸어요. 사람들은 이미 자극적인 뉴스에 많이 노출돼 있어요. 소설도 웬만큼 기이하지 않으면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합니다. 문학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은 여전히 사람 속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에게 등을 돌리고 문학을 계속할 순 없습니다.”

심성미 기자 smsh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