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위험회피 심리를 부작위 편향(omission bias)이라고 한다. ‘omission’은 누락, 태만을 뜻한다. 어떤 일을 하지 않았을 때의 사회적 손실보다 했을 때의 개인적 손실에 더 민감한 심리다. 가만있는 것을 못 참는 행동 편향과는 정반대다. 행동 편향은 상황이 불분명하고 모순적일 때 나타나지만, 부작위 편향은 이해득실이 빤히 보일 때 두드러진다.(롤프 도벨리 《스마트한 생각들》)
몇 해 전 버락 오바마 당시 미국 대통령이 서울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정상회담 후 한국 기자들에게 7~8차례나 질문 기회를 줬지만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엉뚱한 질문으로 혼자 망신을 당하느니 단체로 입을 다문 것이다. 한국사 국정교과서를 채택한 학교에 좌파단체들이 온갖 압력을 가해도 방관하는 심리도 마찬가지다. 부당성은 공감하지만 ‘38선 혼자 지키냐’는 심리로 합리화한다.
부작위 처세술의 달인은 정권 말 관료들이다. 젖은 낙엽처럼 땅에 짝 달라붙어 꿈쩍 않는 복지부동(伏地不動), 눈만 굴리는 복지안동(伏地眼動)이다. 할 일을 안 하면 국가에 손실이지만 개개인에겐 합리적 행동이 된다. 공연히 일을 벌였다가 결과가 나쁘면 본인에겐 치명적이다. 관료 전체가 욕먹겠지만 n분의 1만 감수하면 그만이다. 규제 개혁이 지지부진한 것도 같은 이유다. 규제를 없앴다가 만약 부작용이 생기면 온전히 자기 책임이지만, 그냥 놔두면 책임질 일이 없다.
지난해 일명 ‘선한 사마리아인법’(형법 개정안) 논란이 있었다. 택시기사가 운전 중 의식을 잃고 쓰러졌는데 승객들이 아무런 응급조치나 119 신고도 않고 떠나 결국 기사가 사망한 사건이 계기였다. 자신이 위급하지 않은데도 구호 조치를 하지 않은 것(부작위)을 처벌하면 과연 의인이 많아질까.
인구가 희박한 곳일수록 낯선 타인을 구호하는 게 당연시된다. 오랜 경험에서 자신도 위급할 때 타인의 도움을 기대하는 호혜적 이타성을 체득한 결과다. 인구밀도가 높은 국내에서도 종종 ‘초인종 의인’처럼 타인을 구하다 목숨을 잃는 사람이 있다. 이런 행동은 사회적으론 칭송받지만 본인과 가족에겐 비극이다. 의인을 법으로 강제할 순 없다. 현실적 대안은 행동 편향과 부작위 편향 사이에 있지 않을까.
오형규 논설위원 oh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