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정동길 봄밤
덕수궁 옆 정동(貞洞)골목은 100여년 전 ‘덜덜골목’으로 불렸다. 1901년 덕수궁에 설치된 발전기 소리가 너무 요란해서 생긴 별명이다. 덕수궁 전깃불도 ‘덜덜불’이라 했다. 툭하면 전기가 끊어져 ‘건달불’로 불린 경복궁 전기와 비슷했다. 아관파천 후 덕수궁으로 거처를 옮긴 고종이 밤마다 신변을 걱정하던 시절의 애환이 깃든 이름이기도 하다.

다음 주말 정동야행(貞洞夜行) 축제에서 이 덜덜불을 체험해 볼 수 있다. 그때처럼 전구를 이용해 덜덜꼬마등을 만들면서 자가 발전기의 작동 원리와 전구에 불이 들어오는 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만든 덜덜불로 정동의 밤거리를 밝히는 재미 또한 쏠쏠하다. 아이들과 함께 덕수궁길과 시청별관 앞에서 마당극 ‘덜덜불을 가진 자, 그는 누구인가’도 구경할 수 있다.

오는 27일부터 28일까지 이어지는 정동야행의 주제는 다채롭다. 밤에 피우는 문화의 꽃 야화(夜花), 근대유산을 따라 걷는 야로(夜路), 역사와 함께하는 야사(夜史), 거리에서 펼치는 공연 야설(夜設), 아름다운 봄밤의 야경(夜景), 먹는 즐거움을 누리는 야식(夜食)까지 아우른다. 지난해 인기를 모았던 정동 제일교회와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의 파이프오르간 연주도 흥미를 돋운다.

각국 대사관이나 성공회 수녀원 등은 홈페이지에 미리 신청한 사람만 들어갈 수 있지만, 나머지는 대부분 제한이 없다. 덕수궁 중명전과 옛 러시아공사관, 서울시립미술관 등 5곳에서 안내원의 설명을 들으며 정동을 한 바퀴 도는 것도 좋다. 마침 중구가 개발한 모바일 앱 ‘중구 스토리여행’에서 한국어, 영어, 중국어, 일본어 해설이 나오니 금상첨화다.

개화기 고종이 마시던 커피를 만들어 보는 ‘가비의 향’도 색다르다. 가비는 커피의 한자 표현. 커피콩을 절구에 갈아 맛보고 커피가루는 향첩에 넣어 방향제로 활용할 수 있다. 옛 신문사의 납활자로 가족신문을 찍어 보는 행사도 있다. 덕수궁 중화전 앞에서 펼쳐지는 봄여름가을겨울 콘서트(27일)와 금난새의 고궁음악회(28일) 역시 빠뜨릴 수 없다.

이 길의 추억을 오래 간직하는 특별한 방법도 있다. 근대식 우편제도를 도입한 우정총국이 있던 것에서 착안한 ‘느린 편지’ 이벤트다. 미래로 보내는 편지를 써서 옛날식 우체통에 넣으면 10월 정동야행(마지막 주 금·토) 때 받아볼 수 있다. 정동에는 근대문화 유산만 많은 게 아니다. 돌담길을 따라 걷던 연인들의 밀어와 오래된 골목에 배어 있는 낭만의 향기도 멋스럽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