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남 기자 jope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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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도 로마제국의 초기, 즉 기원후 150년께까지 로마제국은 상당 부분 자유시장경제 국가라고 할 만했다. 로마제국은 자본재를 거래하는 주식시장이 발달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오늘날의 자본주의 국가보다 훨씬 덜 자본주의적이지만, 산업혁명 이전의 어느 농업국가보다도 자본주의적이었다.

전성기의 로마 인구는 어림잡아 100만명으로, 산업혁명 이전까지는 서양에서 가장 큰 도시였다. 제국에는 인구가 10만명 이상인 도시가 최소 6개나 됐다. 이전의 어떤 농경사회보다 도시화가 진행됐다는 의미다. 도시화는 지중해 전역에 걸쳐 도농 간 분업을 촉진해 교역을 발달하게 했다. 밀, 와인, 올리브오일 등과 같은 농산물은 로마를 중심으로 제국에 유입됐다. 교역량이 늘어나고 교역 범위가 확대되면서 로마제국 초기 상인은 산업혁명 이전의 그 어떤 지역과 시기의 상인보다 생산적이었다.

무역, 공공공사 등을 위해 금융중개를 위주로 하는 금융시장도 발달했다. 토지 소유권도 보장해 그 행사에 제한을 가하지 않았다. 이것을 ‘피 심플(fee simple)’이라고 한다. 기원전 111년에는 국공유지의 상당부분을 사유지로 전환했다.

자유로운 임금노동자의 상당수는 농업에 종사했고 제국 초기의 노예는 노동시장의 일부였다. 노예는 명령에 따라야 하지만 자유인과 대등하게 노동시장에 참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노예제도가 매우 개방적이었다는 것이다. 노예 해방이 자주 이뤄졌을 뿐 아니라 노예는 돈을 내고 시민권을 살 수도 있었고, 재산을 소유할 수도 있었다. 극단적으로 노예가 노예를 소유한 경우도 있었다. 로마의 노예는 교육을 받고 책임 있는 경제적 역할을 하도록 장려됐다. 상벌제도, 직업의 다양함 등에 미뤄볼 때 로마의 노예는 오늘날 장기계약의 피고용인과 큰 차이가 없었다. 즉 노동시장은 노예노동과 자유노동을 구분할 수 없을 만큼 매우 자유로웠다. 노예제가 창조성을 떨어뜨렸다거나 로마의 경제제도가 다른 길로 가는 것을 막아 궁극적으로 로마제국의 경제를 정체로 이끌었다는 주장은 틀린 것이다.

이렇듯 제국 초기 무역, 금융, 토지, 노동 등에서 자유시장이었던 로마제국이 멸망한 이유는 무엇인가. 황제들의 경제정책에서 해답을 찾아야 한다. 제국시대 황제들은 인민의 지지를 얻기 위해 두 가지 사업에 역점을 뒀다. ‘빵과 서커스’가 그것이다. 황제들은 검투사(영화 ‘글래디에이터’에서 러셀 크로가 분한 막시무스 장군을 생각해보라)를 이용해 검투경기를 열었고 ‘안노나(Annona)’라는 식량분배제도를 통해 무산자들에게 식량, 특히 밀을 무료 또는 아주 낮은 가격으로 나눠줬다. 때로는 생필품을 구입하라고 주화도 나눠줬다.

오늘날의 복지제도라고 할 수 있는 안노나는 많은 자원이 필요했다. 인구 100만명의 로마시에 안노나의 혜택을 보는 사람은 적을 때는 10만명 정도고 많을 때는 30만명을 웃돌았다. 안노나로 나눠주는 밀의 가격은 무료거나 시장가격의 절반을 넘지 않았다. 안노나는 간헐적이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재정적 부담은 작지 않았다. 안노나를 위해 수입된 밀의 양은 로마 수입량의 약 15~50%라고 역사가들은 추정한다. 여기에 황제들은 군사비용도 마련해야 했다.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선 군인에게 급료를 넉넉하게 지급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군사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세금과 공물로 그 많은 비용을 댈 수 없었던 황제들은 주화에 들어가는 귀금속의 양을 줄이는 방법, 즉 ‘가치변조’를 이용해 시민으로부터 시뇨리지(화폐주조차익)를 징수했다.

그러나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 주화의 가치변조가 잦아짐에 따라 인플레이션이 기승을 부렸다. 황제들은 안노나를 위해 밀 가격을 정했는데, 점차 다른 곡물은 물론 임금, 이자율 등에까지 그렇게 하기 시작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인플레이션을 통제하기 위해 화폐개혁을 단행했을 뿐 아니라 기원후 301년에 모든 재화와 용역의 가격을 통제하는 칙령을 반포했다.

그러나 이런 광범위한 간섭주의는 상황을 개선한 것이 아니라 그때까지 유지됐던 도농 간 복잡한 분업 체제를 더 무너뜨리고 말았다. 특히 도시 근교의 농민은 자급자족을 하거나 도시의 무산자로 전락해 안노나에 의존하는 신세가 됐다. 인구가 점점 증가하면서 로마시 재정은 예전보다 더 어려워졌다. 곡물과 생필품 거래가 불가능해지면서 도시 사람들은 도시를 버리고 농촌에서 자급자족하려고 노력했다. 도시와 농촌 간 분업 체제의 붕괴는 특히 노동시장에 큰 충격을 줬다. 이런 분업체제 붕괴는 제국의 재정에 커다란 압박을 가했다. 안노나, 인플레이션, 간섭주의가 차례로 악순환을 하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로마시를 포함한 제국 전체의 생산성도 누적적으로 떨어졌다. 오늘날의 이탈리아를 포함한 로마제국은 분업이 매우 발달한 시장경제 체제에서 분업이 붕괴한, 자급자족 위주의 농경상태로 되돌아갔다.

로마의 시장경제가 노예제 때문에 멸망했다거나 로마가 점점 더 퇴폐적으로 변했기 때문에 야만인에게 정복당했다는 주장은 틀린 것이다. 로마가 게르만 이주민의 반란을 군사적으로 제압하지 못했기 때문에 멸망했다는 주장도 틀렸기는 마찬가지다. 현대 경제학 용어로는, 로마는 복지정책, 인플레이션, 가격규제 때문에 시장경제가 무너졌고 그 결과 야만인을 대적할 경제적 능력이 없었던 것이다. 이 복지정책, 인플레이션, 가격규제 등을 총칭해 간섭주의라고 한다.

루트비히 폰 미제스는 로마제국의 멸망에 대해 이렇게 역설했다. “로마제국은 자유주의(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를 말함) 정신과 자유기업 정신을 결여했기 때문에 산산이 부서져 먼지가 됐다. 간섭주의 정책과 그 정치적 귀결인 ‘총통원리(모든 걸 황제 혼자서 결정하는 체제)’가 어떤 사회적 실체건 항상 해체하고 파괴하듯이 강력한 제국도 해체했다.”

통화증발 따른 高인플레…이자율도 통제, 금융 마비

로마제국은 기원후 약 150년간 연 1%대의 물가 상승이 있었다. 이 기간 물가가 상당히 안정돼 있었다는 것이다. 한 연구에 의하면 밀 가격은 기원전 150년쯤 6.5㎏당 3~4세스테르티우스(로마제국 화폐의 최소 단위·銅貨)였고 기원후 50년께에는 5~6세스테르티우스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이후 200년 정도, 기원후 151년부터 350년까지의 로마제국 후반기는 물가상승률이 연 3.5~5%를 웃돌았다. 이 기간의 물가상승률을 복리로 계산하면 174~1508배 상승했다는 계산이 나온다. 가히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이라고 하겠다.

제국의 후반기에 인플레이션이 지속되고 높았던 것은 정부가 은화에 포함된 은의 양을 지속적으로 떨어뜨려 통화공급을 늘렸기 때문이다. 물론 통화공급과 관련한 구체적인 자료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이론적으로는 지속적인 물가 상승은 통화공급의 증가밖에 없다. 전염병, 자연 재해 등은 일부 재화가격의 일시적인 상승을 가져오지만 모든 재화의 지속적인 가격 상승은 일으키지 않기 때문이다.

로마제국은 금융시장이 매우 발달했다. 은행, 브로커, 파트너십, 개인, 공공기관 등이 오늘날 금융기관들이 하는 각종 금융중개를 했다. 그 결과 제국 초기 금융기관들은 18세기 프랑스 금융기관보다 효율적이었고 18세기 런던의 금융기관과 비슷했다. 그러나 높은 인플레이션은 당시 로마 전역을 연결했던 금융시장을 서서히 마비시켰다.

로마제국에서의 이자율은 월 1%, 연 12%고 더 이상의 높은 이자율을 정부가 금지했기 때문에 높은 인플레이션은 실질이자율을 크게 하락하게 했거나 심지어 음(陰)이 되도록 했다. 그 결과 기원후 3세기까지 손실을 내고 파산하는 은행이 늘어났다. 마치 오늘날 경제위기로 각종 금융기관이 파산하듯이 말이다.

전용덕 < 대구대 무역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