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서둘러야 할 공직사회 道·術 복원
참혹하다. 꽃다운 학생들이 배 속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을 상상하면 살이 떨리고 등골이 저려 온다. 구조되는 선장과 선원들을 보면 영혼을 잃은 탐욕이 보인다. 우왕좌왕하는 공직자들을 보면 준비되지 않은 ‘얼치기’의 모습들이 나타난다. 지혜와 결단은 보이지 않고, 안이함과 타성, 좌고우면(左顧右眄), 면피성 행동만 눈에 띄는 것은 나의 눈에만 그런 것일까?

어릴 적에 동네 할아버지가 해 주신 이야기 가운데 홍의장군 곽재우의 도술(道術) 이야기는 정말 재미있었다. 장군이 도술로 왜군을 무찌르는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신이 났다. 공부를 하면서 ‘도’와 ‘술’이 구분될 수 있음을 알았다. 도 없는 술은 흉기가 될 수 있고, 술 없는 도는 현실과의 가교가 없다.

전통시대의 상층관료는 ‘사대부(士大夫)’가 담당했고, 하층관료는 ‘이서(吏胥)’가 담당했다. 굳이 대응시킨다면 사대부는 ‘도(공동체가 지켜가야 할 가치)’를 유지하고 지켜나가야 하며, 이서는 그 도를 현실에 실현하는 ‘기술과 절차’의 전문가여야 했다.

그 ‘도’가 무엇인가는 시대에 따라 가감(加減)이 있으나, 사대부의 자세는 분명해야 했다. ‘예기(禮記)’에 ‘군주는 사직을 위해서 죽고, 대부는 무리를 위해 죽으며, 사는 명령에 죽는다(國君死社稷, 大夫死衆, 士死制)’고 했다. 공직의 수행에 ‘죽음(死)’을 공통으로 거론하는 것은 언제든지 ‘죽을 수 있는’ 마음가짐으로 공직을 수행하라는 뜻이다. 고위직은 ‘폼’잡는 ‘장식물’이 아니다.

세월호 침몰에서 선장은 선장의 ‘도’를 외면했고, 탈출한 선원들은 선원의 ‘술’을 갖고 있지 못했다. 사고가 접수된 후 일련의 조치과정에서 과연 지휘의 ‘도’가 있었을까? 구조과정에서 잘 정비된 ‘술’이 적용됐을까? 보도대로라면 유모 회장은 기업가의 ‘도’가 없이 ‘술’을 앞세워 치부한 것이다.

세월호 참사는 국가 사회의 본질을 보여주는 징조이자 단서다. 한국 사회의 각 부문에서 ‘도’가 무너져 있으며, 발전된 ‘술’은 도가 아닌 것에 기인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퇴직 고위공직자를 산하기관에 보내는 것은 도가 아니다. 시찰을 핑계로 유람하는 것도 도가 아니다. 관념적 ‘옳음’을 서로가 강요하는 것도 도는 아니다. 탐욕과 이해관계를 포장하는 법과 규정을 앞세우는 것도 도가 아니다.

우리는 재난 구조의 ‘도’를 몰라도 너무 몰랐다. 인명을 구하지 못하는 브리핑 기술은 허무하다. 법규를 빙자한 ‘핑계’들이 국가와 사회의 건강을 해치고 있다. 핑계는 ‘죽음의 각오’가 없는 공직자들의 전유물이다.

세월호 희생자들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꽃 같은 학생들의 어처구니없는 죽음을 계기로 우리 사회의 각 부분, 특히 공직사회의 ‘도술’ 복원을 서둘러야 한다. ‘물타기’나 ‘핑계’에 휘둘려 또다시 ‘어물쩍’ 하면 희망이 없다.

옛 선비들은 ‘도로써 군주를 섬기되 불가하면 그만둔다(以道事君 不可則止)’고 했다. 국민을 향해 ‘목숨을 거는’ 각오로 ‘도’를 실현하는 것이 보필의 근본이다. 위만 쳐다보는 것은 ‘간신’의 전형이었다.

국가와 사회에 도와 술의 복원이 필요하다. 국가경영과 관료체제의 정비에서 더욱 그렇다. 발전한 사회에 조응해 고시제도 등 인재선발제도부터 정비해야 한다. 각 분야의 도와 술이 결합된 ‘도술’을 갖춘 인재들을 양성하고 충원하는 것이 시급하다.

생각하면 할수록 가슴이 쓰리고 아프다. 사지에 힘이 빠진다. 명복을 빌어 주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것이 더욱 슬프다.

박병련 < 한국학중앙연구원 부원장·행정학 parkbr@aks.ac.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