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전체메뉴
ALICE Q 게임 / 매주 화,금 오픈하는 게임을 만나보세요.

'천재' 미켈란젤로의 연인…어! 여성이 아니라 청년이었네

스토리&스토리 - 예술가의 사랑 (16)

귀족청년 카발리에리에게 사랑의 詩 300여편 바쳐
19세기말 동성애자로 밝혀져

더럽혀진 마음 속죄 의미로 말년에 여성과 정신적 사랑
‘식음을 잊는 것이 그대의 이름을 잊는 것보다 훨씬 쉽다오. 초라하게도 음식은 단지 우리의 육신을 지탱할 뿐이지만 그대의 이름은 나의 육신과 정신 모두를 부양한다오.’(1533년 여름)

‘저는 오늘 피렌체를 떠납니다…내가 살아 있는 한, 어디를 가든 나는 늘 당신과의 의리를 저버리지 않을 것이고, 오로지 당신만을 사랑할 겁니다.’(1533년 12월)

이것은 르네상스의 거장 미켈란젤로가 사랑하는 이에게 보낸 편지들이다. 누구나 이 편지를 보면 미켈란젤로가 아리따운 여인에게 보낸 편지가 아닐까 단정하기 쉬우리라. 그러나 놀랍게도 이 편지는 토마소 카발리에리라는 귀족 청년에게 부친 편지다. 게다가 이것은 아주 일부분일 뿐이다. 미켈란젤로는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해 청년을 향한 누를 수 없는 열정을 쏟아냈다. 그는 이 청년에게 무려 300여편이 넘는 소네트를 헌정하기도 했다. 셰익스피어 이전에 한 남자가 사랑하는 이에게 이렇게 많은 시를 헌정한 적은 없었다. 그는 그림과 조각만 잘 한 게 아니었다.

미켈란젤로가 세상을 뜬 지 60여년이 경과한 1623년, 그의 조카의 아들이 우연히 그의 육필 시고를 접하게 됐다. 그는 너무나도 아름다운 시구들에 매료돼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조카의 아들은 시를 읽어나가면서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연시들이 온통 남자들에게 바쳐진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가문의 수치였다. 그러나 단테와 페트라르카 뺨치는 그 주옥 같은 시들은 그냥 묻어버리기에는 너무나 아까웠다. 그는 고심 끝에 이 시들을 출판하기로 결심했다. 대신 그는 시 속의 대명사를 모조리 여성형으로 바꿔버렸다. 이 시집은 오랫동안 미켈란젤로의 명성을 드높이는 데 기여했지만 한편으론 250여년간 미켈란젤로가 동성애자였다는 사실이 가려지는 계기가 됐다.

사실 르네상스기는 그 어느 시대보다 동성애가 만연한 시기였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산드로 보티첼리, 인문학자 마르실리오 피치노 등이 동성애자라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미켈란젤로 역시 동성애자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그런 소문의 빌미는 대부분 미켈란젤로 자신의 부주의한 처신이 자초한 것이기도 했다. 그는 게라르도 페리니, 페보 디 포기오 같은 눈부신 외모의 청년들을 조수로 고용했다. 그는 또 새로운 작품에 착수할 때마다 건장한 신체의 젊은 청년들을 아틀리에로 불러들였다. 메디치가의 묘실을 장식하기 위해 ‘밤’을 여성으로 의인화한 조각 작품을 제작할 때도 남자를 모델로 고용했다고 한다.

미케란젤로가 동성애적 성향을 가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지극히 금욕적인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의 조수였던 아스카니오 콘디비에 따르면 미켈란젤로는 늘 자신이 가난한 사람처럼 살아왔다고 뇌까렸다고 한다. 실제로 그는 먹고 마시는 것을 잊는 경우도 많았고 작업하다가 날이 저물면 작업복 차림 그대로 신발을 신은 채 잠자리에 들었다고 한다. 외모에 무심한 데다 잘 씻지도 않은 탓에 그는 사람들 사이에 별로 인기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누구보다도 강한 열정을 간직한 사내였다. 다만 그의 남다른 자제력이 그 열정을 억제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그 참을 수 없는 열정을 젊은 청년들에게 쏟아낸 것이었다. 미켈란젤로는 카발리에리에게 ‘그의 아름다운 신체를 감싸는 옷’이 되고 싶다고 에로틱하게 고백할 정도였지만 실제로 그와 육체적 사랑을 나눴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어찌 보면 그와의 관계는 정신적인 사랑이라고 봄이 타당하리라.

그의 열정이 가장 진한 흔적을 남긴 것은 바로 그의 작품들이었다. 그는 심지어 시스틴 성당 벽화에 자신이 마음으로 연모하는 남성들의 모습을 그려넣기까지 했다. 그 형상은 그의 연인들과 너무도 비슷해서 동료 화가인 아레티노가 알아차릴 정도였다. 아레티노는 그림 속의 페리니와 카발리에리의 모습을 가리키며 미켈란젤로의 불경함을 비난하기도 했다. 조각상 ‘승리’에서는 카발리에리를 구세주로 묘사하기도 했다.

만년에 미켈란젤로는 비토리오 콜로나라는 지적이고 정결한 미망인과 사랑을 나눈다. 이 여인에 대한 사랑은 아름다운 남성들에게 바쳐진 종전의 에로틱한 사랑과는 달랐다. 그는 마치 페트라르카가 라우라에게 바친 연시나 단테가 베아트리체에게 쓴 순결한 시에 비견될 만한 고차원적인 정신적 사랑을 이 여인에게 바쳤던 것 같다. 그것은 예전에 가졌던 음탕한 마음에 대한 일종의 회개였다. 그가 시스틴 성당의 벽화 ‘최후의 심판’에 거죽이 벗겨진 자신의 모습을 묘사한 것은 뼈를 깎는 회개의 표시였는지도 모른다.

미켈란젤로는 죽기 전에 자신의 드로잉과 문건들을 모조리 태워버렸다. 그러나 연인에게 보낸 편지와 시까지 은폐할 수는 없었다. 그 부끄러운 베일을 들춰낸 사람은 19세기 말 영국의 동성애운동가인 존 애딩턴 시먼즈였다. 그는 시집의 여성형 대명사를 모두 남성형으로 되돌려놨다. 학자들은 경악했다. 이 사실을 인정했다간 수백 년 동안 쌓아온 미켈란젤로의 빛나는 성채가 허물어질 게 분명했다. 이로부터 다시 지루한 은폐의 한 세기가 흐른다. 그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이 인정된 것은 20세기 후반이 돼서다. 이제야 우리는 그의 작품 속에서 남성의 아름다움을 예찬하던 작가의 열정의 흔적을 제대로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정석범 문화전문기자 sukbumj@hankyung.com
  1. 1
  2. 2
  3. 3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1. 1
  2. 2
  3. 3
  4. 4
  5. 5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