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향후 비전에 대해 어떻게 전망하고 있는가’라는 온라인 포털의 질문에 직장인의 60% 이상이 ‘현재 직업으로는 비전이 없다’고 답했다. 상사에게 바라는 가장 큰 소망으로는 ‘비전 제시’를 첫 번째로 꼽았다.

#27세에 대기업에 입사한 J씨의 사연

J씨는 16년 동안 근무 후 43세 되던 2002년 명예퇴직을 했다. 직장을 다니면서 결혼도 하고, 집도 장만했다. 남부럽지 않은 연봉에 여유 있는 생활을 했지만, 직장에선 더 이상 비전을 찾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한 살이라도 젊을 때 사업을 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생각으로 과감히 회사에서 나왔다.

퇴직 3개월 만에 유명 프랜차이즈 제과점을 열었다. 창업지원센터에서 안내해준 대로 퇴직금과 명퇴금을 모두 동원해 창업했다. 1년 동안 정말 열심히 일했다. 직장인이 아닌 오너로서의 긍지와 책임감으로 흥분에 빠진 1년이었다. 직장 출근 땐 아침에 벽을 할퀴면서 간신히 일어났지만, 창업 후에는 날이 밝기도 전에 자연스럽게 눈이 떠졌다.

그러나 가맹점 계약기간을 다 채우지도 못하고 3년 만에 문을 닫았다. 열심히 일한 수입의 대부분이 이름뿐인 본사로 빨려들어가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그 뒤 학원과 집 이외에는 두문불출 수험생 모드로 돌입했다. 6개월 만에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고3 수험생 이상으로 힘든 인고의 시간을 보낸 결과였다. 국가 자격증을 처음으로 손에 넣은 날, 고생은 끝난 줄 알았다. 공인중개사 사무실을 열었다. 그러나 그것도 오비이락, 까마귀 날자 배가 떨어졌다. 부동산 침체가 본격화된 것이다. 2년 만에 다시 폐업신고를 했다. 그동안 명퇴금과 퇴직금 모두가 사라졌다.

#J씨의 퇴직 후 10년

중학생을 대상으로 수학 개인교습을 시작했다. 아파트단지 내에서 혼자 할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에 수입은 많지 않았지만 마음은 편했다. 낮과 밤을 바꾸는 대리운전이 아님을 다행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도 2년을 넘기지 못했다. 결국 집을 담보로 은행에서 돈을 빌렸다. 그 돈으로 파생상품 매매를 하는 주식에 손을 댔다. 그것 역시 그의 편이 아니었다. 금융위기로 인해 큰 피해를 보았다.

퇴직 후 10년이 태풍처럼 삶을 할퀴고 지나갔다. 43세의 나이가 어느덧 53세가 됐다. 까맣던 머리카락은 반백으로 변했고, 안경 없이도 잘 보이던 눈은 예전 같지 않았다. 10년 만에 다시 취업 시장을 기웃거려 봤지만 가능성이 희박했다. 이렇게 또 10년이 지나면 63세가 된다. 앞날을 생각하면 갑갑하지만, 길은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을 가져본다.

#베이비부머 마지막 세대 K씨

K씨 역시 내년이면 50세가 되는 베이비부머 마지막 세대다. 그는 견실한 중견 기업에서 10년간 전문직으로 일했다. 10년 동안 너무 정체돼 더 이상의 성장이 어렵겠다는 판단으로 규모는 조금 작지만, 성장 가능성이 있을 것 같은 두 번째 회사로 옮겼다. 하지만 그곳에서 1년을 버티지 못했다. 조직과 업무 체계가 잡히지 않은 새로운 회사의 시스템 속에서 버틸 수 없었다. 분위기가 바뀌면 새로운 시작이 될 것이라는 믿음이 무너져버렸다. 좀 더 치밀하게 준비를 하고 전직하지 못한 것이 후회스러웠다. 그렇다고 전에 있던 회사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6개월을 쉬다 더 작은 기업에 취업했다. 회사의 시스템이나 조직이 열악했지만, 그렇다고 바로 퇴직할 수는 없었다. 2년 동안 가까스로 버텼지만 더 이상은 무리였다. 또 퇴직했다. 3개월을 쉬었다. 정부에서 주는 전직지원 수당을 신고하러 지방 고용노동부를 찾아갈 때마다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별 도리가 없었다.

이번에는 잘 알고 지내던 선배의 추천으로 국내 기업의 중국 공장으로 나가게 됐다. 적지 않은 나이에 해외 근무라는 것이 무리인줄은 알았지만, 더운밥 찬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그렇게 중국에서 4년 동안 일했다. 그곳에서도 더 이상은 무리였다. 바로 귀국했다. 다시 수소문 끝에 지인의 소개로 작은 기업에 취업했다. 10명도 안되는 기업에서 임원으로 일 했지만, 그것도 2년이 한계였다. 회사의 부도를 막을 수 없었다.

그 뒤로 지금까지 3년 동안 특별한 일 없이 살아가고 있다. 이제는 더 이상 비비고 들어 갈 곳을 찾을 수 없음에 한계를 느낀다. 더 큰 문제는 앞으로 최소 20년 동안은 일을 더 해야 한다는 데 있다. 순간순간 열심히 살아온 결과가 이렇게 마무리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어디서 잘못된 것인지,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매일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것도 이제는 질린다.

#비전, 정말 없는 건가

지금 우리 사회에는 생각보다 많은 J씨, K씨들이 있다. 비전을 찾아 스스로 직장을 박차고 나왔지만 결국 비전을 찾지 못해 힘들어 하는, 욱하는 성격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이 정도 경력이면 나가서 충분히 잘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어디에 근거를 둔 것일까. 검증된 아이템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고, 특별한 자기 브랜드가 있는 것도 아닌, 단지 안정된 기업에 오랫동안 다녔다는 것만 갖고 밖에 나가서 당당히 설 수 있다는 그 무모한 용기는 어디서 온 것일까.

비전이 없다는 이유로 전직을 하는 직장인이 많다. 정말 그럴까. 혹시 연봉을 조금 더 많이 준다는 헤드헌터의 권유에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아닐까. 시도 때도 없이 간섭하고 짜증내는 상사를 피하기 위해 전직을 고려하기 시작한 것은 아닐까. 아니면 업무 성적이 형편없어 낮은 고과 평가 때문에 승진에 문제가 될 것 같아 미리 손을 쓰기 위해 전직을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아닐까. 그 모든 것을 비전이라는 것으로 포장해 사직을 자기합리화한 것은 아닐까.

직장인의 가장 흔한 고민 중 하나가 비전이라는 문제다. 직장인의 비전은 당연히 회사에서 만들어줘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무리 기업이 비전을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해도, 종업원 각자의 개인적 비전까지 책임을 지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러니 개인의 비전은 개인이 세울 줄 알아야 한다. 자신의 업무를 십분 활용해 자신의 역량을 키워가면서 개인의 미래를 도모해야 한다.

#회사 비전보다 중요한 것

‘우리 회사는 비전이 있다’는 말을 그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 ‘우리 회사는 비전이 없다’는 말도 믿어서는 안 된다. 이 말은 회사의 비전을 믿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회사의 비전과는 무관한 개인의 비전을 생각해 보라는 의미다. 개인의 비전이 있는지, 아니 내가 비전을 세웠는지 아닌지를 확인해 보고 내가 세운 비전이 없다면 아무리 회사의 비전이 좋다고 해도 그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회사의 비전보다 중요한 것이 개인의 실력, 개인의 역량, 개인의 자기 브랜드다. 담당 업무를 완벽하게 처리할 수 있는 실력과 역량 속에서 개인의 미래 브랜드가 만들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비전에 속지 마라. 회사에 비전이 없다고 판단해 쉽게 전직을 한다든지, 개인의 막연한 희망 비전으로 중도에 회사를 나오는 실수를 줄여야 한다. 비전보다 중요한 것이 실력이고, 역량이고, 개인의 브랜드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정리=이주영 한경아카데미 연구원 opeia@hankyung.com



최종엽 <잡솔루션코리아 대표 ceo@jobsolution.co.kr>

△광운대 전자공학과, 한양대 교육대학원 인재개발교육 석사△페어차일드코리아 부장, 삼성전자 차장 △현 경희대·한양대 사회대교육원 겸임교수 △저서 ‘블루타임’ ‘사람예찬’ ‘서른 살, 진짜 내 인생에 미쳐라’ ‘나이아가라에 맞서라’ ‘물망초 연가’ ‘미국특보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