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6년 4월9일 피렌체의 시청사인 시뇨리아궁으로 한 장의 투서가 날아들었다. 자코포 살타렐리라는 17세의 남창과 동성애 관계를 맺은 네 명의 고객을 통렬히 고발하는 내용이었다. 거명된 인물은 재단사 바치노, 바르톨로뮤 디 파스키노, 유력 귀족가문의 청년인 레오나르도 토르나부오니, 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1519)였다.

당시 피렌체에는 르네상스의 움직임과 함께 성적인 문란이 걷잡을 수 없이 심화되고 있었는데 특히 소년과의 동성애인 ‘소도미아(sodomia)’의 확산은 양식 있는 이들의 우려를 자아냈다. 시도 적극 대응에 나서 풍기단속 규찰대를 조직하는 한편 시청사에 윤리죄 고발 투서함을 설치했다. 고발된 자들은 즉시 체포돼 수치스러운 취조를 받아야 했고 법정에서 중형이 선고됐다.

전도유망한 24세의 화가 다빈치는 기 한번 제대로 못 펴고 스러지는 듯했다. 그러나 팔자는 타고나는가 보다. 그는 얼마 후 기적같이 불기소처분을 받고 풀려난다. 함께 고발됐던 귀족 청년의 부모가 당시 피렌체의 실질적 지배자였던 메디치가에 은밀히 손을 쓴 것이었다. 다빈치로선 줄 한번 기막히게 선 셈이었다.

결과야 어찌 됐건 이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인해 다빈치가 받은 마음의 상처는 쉽사리 치유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 사건의 충격 때문이었을까.

이후 그는 극도로 성(性)을 혐오하는 자세를 보이게 되며 평생을 독신으로 살아간다. 그에게 성은 사랑의 완성이 아닌 한 낱 종족 보존을 위한 혐오스러운 행위일 뿐이었다. 그는 제자들에게 “정신적 열정이 관능적 쾌락을 몰아낸다”며 금욕을 강조했고 “화가는 고독해야 한다”고 공언할 정도였다.

그러면 그는 정말 평생 자신의 열정을 억제하고 살았던 것일까. 이 점에 대해 다빈치 자신은 묵묵부답이다. 그는 평생 1만3000쪽에 달하는 방대한 기록을 남겼지만 자신의 사생활에 대해선 일언반구 흘리지 않았다. 우리가 접할 수 있는 그의 사생활에 대한 얘기는 모두 주변 사람들의 증언이나 제3자의 기록에 의존한 것들이다.

정신분석학자인 프로이트는 다빈치가 동성애자인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남색사건을 계기로 자신의 열정을 억누르고 이를 연구에 대한 열정과 맞바꿨다고 주장했다. ‘독신의 역사’를 쓴 엘리자베스 아보트 역시 “남색사건의 트라우마(정신적 외상)가 그를 독신의 삶으로 몰아갔다”고 단정했다. 그러나 문화비평가인 데이비드 프리드먼은 다빈치가 남긴 기록 속에 보이는 성과 남성에 대한 과도한 집착을 감안할 때 그가 열정을 억제했다고 보기는 어렵다며 금욕론을 일축했다.

그러나 보다 신빙성 있는 단서는 다빈치와 제자들의 관계 속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다빈치의 아틀리에는 늘 한수 배우려는 젊은이들로 문정성시를 이뤘는데 그중 1490년(38세)에 들어온 지아코모 카포티(일명 ‘살라이’)와 1506년(54세)에 제자가 된 프란체스코 멜치에 대한 다빈치의 애정은 각별했다. 특히 카포티는 다빈치 작품의 모델이 됐던 인물로 다빈치의 사랑과 증오를 동시에 받았던 인물이다. 다빈치 소유 포도밭 소작인의 아들이었던 그는 우아하고 아름다운 외모에 곱슬머리를 한 금발 청년으로 절세의 미인도 그만한 아름다움을 뽐내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래서 다빈치의 사랑이 남달랐지만 도벽에 낭비벽도 심해 스승을 고통스럽게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다빈치가 그를 내치지 않고 30여년이나 곁에 뒀고 나중에 ‘모나리자’ 등 자신의 명품을 대거 물려줬다는 점에서 그가 다빈치에게는 제자 이상의 존재였음을 알 수 있다. 살라이에 대한 다빈치의 특별한 감정은 그를 ‘세례 요한’을 비롯한 여러 작품의 모델로 삼았다는 점에서도 잘 드러난다.

특히 ‘모나리자’를 남성, 즉 살라이를 모델로 그렸다는 최근의 주장은 가히 충격적이다. 2011년 1월 이탈리아 국립문화재감정위원회는 모나리자의 코와 입이 살라이를 모델로 그려진 ‘세례 요한’의 그것과 정확히 일치한다는 공식 발표를 내놨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한 프랑스 연구자는 ‘모나리자’의 초벌 그림들을 조사한 결과 원래는 어깨가 훨씬 넓고 가슴이 없어 남성을 모델로 했음이 분명하며 이는 살라이의 신체와 정확히 일치한다고 단언했다.

이런 모든 논란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건 다빈치의 가슴속에는 여자 대신 남자가 들어앉아 있었다는 사실이다. 모나리자에서 풍기는 묘한 중성적 아름다움이 실은 자신이 사랑하는 제자에 대한 연모를 담아낸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은근히 닭살이 돋는다.

정석범 문화전문기자 sukbum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