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중동진출, 체면과 실속사이
“유럽계 글로벌 기업들은 중동에서 함께 사업하자고 먼저 제안해옵니다. 반면 중동 시장개척에 나서겠다고 밝힌 한국 대기업들은 공동사업에 시큰둥합니다.”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에서 통신설비 시공사업을 하고 있는 중소기업 코미의 노원오 대표는 이렇게 말했다. 이 회사는 직원수가 30명밖에 안되는 소규모 기업이다. 하지만 현지 통신 설비업계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하다. 사우디아라비아 건설회사 중 가장 높은 등급인 ‘1군 업체’로 등록돼 있다.

작년 초에는 사우디아라비아 민간 통신사로부터 1조원을 웃도는 대형 통신망 공사를 따냈다. 회사 규모에 비해 큰 규모의 공사를 수주하다보니 파트너가 필요했다. 국내 대기업들을 접촉했지만 이들의 답변은 한결 같았다. “어떻게 중소기업이 따낸 계약을 대기업이 하도급 형태로 가져가느냐”는 반응이었다.

국내 대기업들이 이렇듯 ‘체면’에 신경쓰는 사이, 유럽과 중국 기업들은 발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풍부한 현지 네트워크를 가진 회사를 찾아 전략적 협력관계를 맺고 있다. 높은 건설등급을 보유하고도 대규모 공사를 단독으로 진행할 능력이 부족한 중소 업체들이 타깃이다.

해외 기업들의 이런 행보에는 이유가 있다. 아무리 유명한 글로벌 기업이라도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높은 건설등급을 받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네트워크를 중시하는 현지 관행상 양질의 공사를 따내는 것도 쉽지 않다. 그럴 바에는 현지의 중소기업과 협력관계를 맺어 실적과 네트워크를 쌓아가는 것이 유리하다는 게 이들의 판단이다.

국내 건설사 관계자는 “사우디아라비아에 일찍 진출한 중소기업들과 협력하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국내 대기업들 정서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최근 ‘제2의 중동붐’이 이슈로 떠올랐다. 대기업들은 앞다퉈 중동 진출 계획을 세우고 있다. 정부도 사우디아라비아 대규모 주택건설 공사에 국내 기업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적극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사우디아라비아에는 현지 중소기업과의 협력을 통해 진행할 수 있는 알짜 사업이 많다. 수익성이 높고 시장 선점 기회가 있는 프로젝트도 수두룩하다. 국내 대기업들이 체면을 잠시 내려놓고 실속을 찾는다면 보다 많은 기회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오동혁 증권부 기자 otto83@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