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화 명작기행] 장 프랑수아 라파엘리의 '파리, 오스망 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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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뚝 솟은 백화점 돔 아래…한껏 멋낸 파리지앵, 발디딜 틈 없는 번화가
검정색 인파와 밝은 도로 대조…활기 넘치던 파리 번화가 포착
검정색 인파와 밝은 도로 대조…활기 넘치던 파리 번화가 포착
19세기 말 파리의 오스망 대로는 주말 오후마다 넘쳐나는 인파로 몸살을 앓았다. 제2 제정기에 본격화한 파리시의 대대적 정비 이후 거리는 예전보다 훨씬 넓어졌지만 쇄도하는 인파로 인해 마차를 탄 신사와 귀부인이 꼼짝없이 사람들 사이에 갇히는 것은 그리 드물게 보는 풍경이 아니었다.
이곳에 사람이 몰리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19세기 말의 오스망 거리는 파리에서도 사람들의 눈을 가장 자극하는 곳이었다. 동서로 뻗은 대로의 북변 중앙에는 이국적인 돔의 프랭탕백화점,그 맞은편에는 네오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오페라 가르니에가 우아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지척에 자리한 생 라자르 역은 당시 파리 제1의 철도역으로 당대인들에게 과학적 진보의 상징물로 인식됐다. 신고전주의 양식의 에두아르 앙드레 저택도 오스망 대로의 서쪽 끝에서 행인들의 시선을 자극했다.
인구의 유입을 자극한 가장 큰 동인은 프랭탕백화점이었다. 1865년 이곳에 터를 잡은 이 백화점은 새롭게 대두한 중산층에 귀족들의 전유물이었던 고급스러운 상품들을 합리적인 가격에 공급한다는 모토 아래 출범했다. 프랭탕은 정찰제와 브랜드 마케팅 등 근대 백화점의 롤모델을 제공한 곳으로 유명하다.
1874년에는 엘리베이터를 설치해 고객의 눈을 휘둥그레지게 만들었고,1888년에는 프랑스 백화점 중 최초로 전기 조명을 도입했다. 현란한 식물 문양으로 장식한 대형 돔 아래 마련된 다방은 장안의 명물로 통했다. 이 모든 것들은 이곳에 진열된 상품들과 더불어 근대 도시민이 꿈꾸던 욕망의 총화였다. 1894년에는 프랭탕 옆에 라파예트백화점이 문을 열어 오스망 대로는 파리 중산층 소비문화의 메카가 됐다.
굳이 물건을 사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이곳은 인기 있는 산책로였다. 이곳에 가면 멋 부린 댄디풍의 신사들과 성장을 한 세련미 넘치는 젊은 여인들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사내들은 이곳을 어슬렁거리며 아리따운 미지의 여인을 훔쳐보는 재미에 탐닉했다. 시쳇말로 이곳은 물 좋은 곳이었다. 예전 같으면 쳐다볼 엄두도 못 낼 외간 여인의 얼굴을 거대 도시가 부여한 익명성을 담보로 마음껏 훔쳐볼 수 있었던 것이다. 19세기 말의 파리는 세계 예술의 수도였을 뿐만 아니라 소비문화가 무르익은 감각의 제국 수도이기도 했던 것이다.
파리 시민들의 일상을 즐겨 그렸던 인상주의자들에게도 오스망 대로는 풍부한 소재거리를 제공해줬다. 카이유보트는 한낮의 생 오귀스탱 광장 풍경을 화폭에 담았고,마네와 모네는 생 라자르 역의 철마에 마음을 빼앗겼다. 특히 프랭탕백화점 앞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무수한 검은 옷의 물결에 주목한 것은 장 프랑수아 라파엘리(1850~1924)였다.
라파엘리는 원래 음악과 극작에 힘쓰다 뒤늦게 화가로 전향한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로 미술 교육이라곤 파리 보자르에서 3개월 받은 게 전부였지만 타고난 재능은 감출 수 없었다. 그는 특별히 주제의식에 구애받지 않았던 인상주의자들과 달리 텐느의 환경결정론을 바탕으로 넝마주이 같은 산업사회가 낳은 소외계층에 주목하는 한편 새롭게 떠오르는 도시민의 일상적 삶을 담담히 그려 나갔다.
이 같은 라파엘리의 사실주의적 성향은 인상주의 그룹의 핵심 멤버 중 하나였던 에드가 드가의 관심을 끌었고 1880년과 1881년의 인상주의전 참여로 이어진다. 그러나 라파엘리의 가세는 그의 작품을 달가워하지 않았던 모네의 반발을 부르고 이는 인상주의 그룹 해체의 불씨가 된다.
'파리,오스망 대로'는 라파엘리가 인상주의 그룹전에 참여한 1880년께 그린 작품으로 오스망 대로의 주말 풍경을 포착한 듯하다. 대로변의 가로수들이 아직은 엷은 빛을 띠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계절은 이제 막 봄에 진입한 것처럼 보인다.
인상주의자들의 성향을 의식한 탓인지 이 작품 속에는 작가가 빛의 효과를 의식한 태가 역력하다. 그 점은 쏟아지는 인파의 검정색과 햇빛을 반사한 도로 바닥의 흰색이 눈부신 대조를 보이는 데 잘 나타나 있다. 가까이 있는 나무의 잎사귀를 원색의 색점을 병치해 감상자의 눈에서 섞이게 한 점 역시 인상주의의 교의를 충실히 반영한 것이다. 그러나 작가의 사실주의적 비판의식은 숨길 수 없는 것이었다. 그가 주목한 것은 소비문화의 성전인 백화점 앞을 배회하는 무수한 인파의 물신숭배적 성향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래서일까. 백화점의 돔은 마치 예배당의 첨탑처럼 보인다.
에밀 졸라는 일찌감치 이 점을 꿰뚫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소설 '루공-마카르 총서' 11권 《여인들의 행복》에서 19세기 후반 잇달아 문을 연 백화점을 두고 '고객을 위한 소비의 대성당'이라고 표현했는데 이는 산업사회의 물신숭배 현상을 비꼰 것이었다. 졸라의 말대로 백화점은 어느 새 우리에게 교회나 사찰보다 자주 가는 소비의 성전이 돼 있지 않은가.
정석범 < 미술사학 박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