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고전 인물열전] (48) 여태후(呂太后), 전횡 일삼은 '유방의 妻'…漢나라 기틀을 잡은 건 사실 그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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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논정(蓋棺論定)이란 말이 있다. 관 뚜껑을 덮고 나서 그 사람의 가치를 평가해야 한다는 말이다. 고조 유방의 조강지처였던 여태후는 역사에서 어떻게 평가 받았을까.
여태후의 이름은 여치(呂雉)다. 효혜제(7년간 재위)와 딸 노원태후(魯元太后)를 낳았으며,건달 출신의 유방을 그림자처럼 도왔다. 그러나 갖은 난관 끝에 정권을 잡은 유방은 척희(戚姬)라는 희첩을 아꼈다. 그녀가 등장하면서 버림받은 여태후는 독을 품게 된다. 더구나 척희가 훗날 조은왕이 된 여의(如意)를 낳으면서 여태후는 후계자 문제에서도 불안해 하게 된다.
척희가 유방의 침소에서 자신의 아들을 태자로 삼게 해 달라고 간청했지만,나이 많은 여태후는 그와 함께 파란만장했던 예전의 소회를 풀 기회조차 드물었다. 여의가 조왕에 세워진 뒤 태자에 오를 뻔하자 여태후의 위상은 더욱 흔들렸다.
여태후의 두 오빠는 모두 장군이었다. 무인 기질의 집안에서 나고 자란 그녀는 고조가 세상을 떠나자 척희와 조왕 여의에 대한 원한을 여지없이 드러낸다. 죄 지은 궁녀를 유폐하는 영항(永巷)에 척희를 가두고 조왕도 불러들이라고 호통을 쳤다. 생전의 고조는 이런 것을 예견해 건평후(建平侯) 주창(周昌)을 승상으로 삼아 측근에서 둘을 보호하게 했다. 여태후의 호출 명령이 세 차례나 전해진 후 주창이 사자에게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고제(高帝)께서 제게 조왕을 부탁하셨는데,조왕은 지금 나이가 어립니다. 태후가 척희 부인을 원망해 조왕을 불러 함께 죽이려 한다고 들었기에 저는 감히 조왕을 보낼 수 없습니다. 게다가 조왕은 병까지 걸렸으니 조칙을 받들 수 없습니다. "(사기 여태후본기)
조왕은 여태후의 치솟은 분노를 알았기에 자신의 이복 형인 혜제 곁에서 목숨을 보존하려고 했고,이런 사정을 아는 혜제는 늘 곁에서 말 없는 후원자가 돼 주었다. 그러다 보니 여태후 역시 조왕을 죽일 기회를 좀처럼 얻지 못했다. 그러나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효혜제 원년 12월에 혜제가 활을 쏘러 간 사이 여태후는 사람을 보내 독을 탄 술을 먹여 조왕을 죽여버린다.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여태후는 척희의 손과 발을 자르고,눈알을 뽑고,귀를 태워 돼지우리에 가뒀다. 그리고 자신의 아들 효혜제를 불러 '사람 돼지'를 구경하게 했다.
혜제는 시종들에게 물어보고 나서야 그녀가 척희라는 것을 알고 큰 소리로 울었다. 이 일로 병이 나 1년이 지나도록 일어날 수조차 없을 지경이었다. 혜제는 어머니 여태후에게 사람을 보내 인간으로서 할 짓이 아니라고 간청했다. 그는 어머니의 잔혹함에 몸서리를 치다 천하를 다스릴 자신이 없다며 술과 여자에 빠져들었다. 결국 병이 든 지 7년 만에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떠났다. 이때도 여태후는 곡소리만 낼 뿐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이후 여태후는 천하를 손에 넣었다. 모든 호령은 그녀에게서 나왔다. 고황후 원년이라는 새로운 연호를 사용하고,이전 공신인 주발과 관영 등의 비호를 받으며 핵심 요직에 유씨가 아닌 여씨들을 앉혔다.
이런 전횡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한나라는 체제가 정비되고 형벌이 없어지는 등 긍정적인 국가로 성장했다. 여태후는 인격적으로 결함이 있었지만 천하 경영이란 공적 영역에서 남긴 업적은 많았다. 그의 국가 경영 실적은 유약하고 무능한 혜제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났다. 사마천은 이런 점을 찬사했다. 여태후가 제왕들의 영역인 '본기'에 당당히 자리를 차지한 이유다.
김원중 < 건양대 중국언어문화학과 교수 >
여태후의 이름은 여치(呂雉)다. 효혜제(7년간 재위)와 딸 노원태후(魯元太后)를 낳았으며,건달 출신의 유방을 그림자처럼 도왔다. 그러나 갖은 난관 끝에 정권을 잡은 유방은 척희(戚姬)라는 희첩을 아꼈다. 그녀가 등장하면서 버림받은 여태후는 독을 품게 된다. 더구나 척희가 훗날 조은왕이 된 여의(如意)를 낳으면서 여태후는 후계자 문제에서도 불안해 하게 된다.
척희가 유방의 침소에서 자신의 아들을 태자로 삼게 해 달라고 간청했지만,나이 많은 여태후는 그와 함께 파란만장했던 예전의 소회를 풀 기회조차 드물었다. 여의가 조왕에 세워진 뒤 태자에 오를 뻔하자 여태후의 위상은 더욱 흔들렸다.
여태후의 두 오빠는 모두 장군이었다. 무인 기질의 집안에서 나고 자란 그녀는 고조가 세상을 떠나자 척희와 조왕 여의에 대한 원한을 여지없이 드러낸다. 죄 지은 궁녀를 유폐하는 영항(永巷)에 척희를 가두고 조왕도 불러들이라고 호통을 쳤다. 생전의 고조는 이런 것을 예견해 건평후(建平侯) 주창(周昌)을 승상으로 삼아 측근에서 둘을 보호하게 했다. 여태후의 호출 명령이 세 차례나 전해진 후 주창이 사자에게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고제(高帝)께서 제게 조왕을 부탁하셨는데,조왕은 지금 나이가 어립니다. 태후가 척희 부인을 원망해 조왕을 불러 함께 죽이려 한다고 들었기에 저는 감히 조왕을 보낼 수 없습니다. 게다가 조왕은 병까지 걸렸으니 조칙을 받들 수 없습니다. "(사기 여태후본기)
조왕은 여태후의 치솟은 분노를 알았기에 자신의 이복 형인 혜제 곁에서 목숨을 보존하려고 했고,이런 사정을 아는 혜제는 늘 곁에서 말 없는 후원자가 돼 주었다. 그러다 보니 여태후 역시 조왕을 죽일 기회를 좀처럼 얻지 못했다. 그러나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효혜제 원년 12월에 혜제가 활을 쏘러 간 사이 여태후는 사람을 보내 독을 탄 술을 먹여 조왕을 죽여버린다.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여태후는 척희의 손과 발을 자르고,눈알을 뽑고,귀를 태워 돼지우리에 가뒀다. 그리고 자신의 아들 효혜제를 불러 '사람 돼지'를 구경하게 했다.
혜제는 시종들에게 물어보고 나서야 그녀가 척희라는 것을 알고 큰 소리로 울었다. 이 일로 병이 나 1년이 지나도록 일어날 수조차 없을 지경이었다. 혜제는 어머니 여태후에게 사람을 보내 인간으로서 할 짓이 아니라고 간청했다. 그는 어머니의 잔혹함에 몸서리를 치다 천하를 다스릴 자신이 없다며 술과 여자에 빠져들었다. 결국 병이 든 지 7년 만에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떠났다. 이때도 여태후는 곡소리만 낼 뿐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이후 여태후는 천하를 손에 넣었다. 모든 호령은 그녀에게서 나왔다. 고황후 원년이라는 새로운 연호를 사용하고,이전 공신인 주발과 관영 등의 비호를 받으며 핵심 요직에 유씨가 아닌 여씨들을 앉혔다.
이런 전횡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한나라는 체제가 정비되고 형벌이 없어지는 등 긍정적인 국가로 성장했다. 여태후는 인격적으로 결함이 있었지만 천하 경영이란 공적 영역에서 남긴 업적은 많았다. 그의 국가 경영 실적은 유약하고 무능한 혜제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났다. 사마천은 이런 점을 찬사했다. 여태후가 제왕들의 영역인 '본기'에 당당히 자리를 차지한 이유다.
김원중 < 건양대 중국언어문화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