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4월22일.경북 안동의 병산서원엔 전국 각지에서 제관(祭官)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이날은 조선 선조 때의 명재상이었던 서애 유성룡의 타개 400주년을 추모하기 위한 향사(享祀 · 서원에서 지내는 제사)가 거행되던 날. 평소엔 보기 어려운 덕수 이씨 종손이 종헌관(終獻官)으로 향사에 참여했다.

덕수 이씨는 충무공 이순신이 태어난 종파로 420여년 전 충무공을 발탁해준 유성룡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해 이날 종헌관을 비롯해 여러명의 제관을 보내왔다. 덕수 이씨 문중이 병산서원에 제관을 보내는 전통은 400년을 고스란히 이어왔다는 게 병산서원 관계자의 설명이다.

유성룡이 1542년생,이순신이 1545년생으로 세 살 차이인 두 사람은 서울 건천동(현 중구 인현동)에서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죽마고우였다. 유성룡의 권유로 문관집안출신이면서도 무과로 급제,무관의 길을 걷게된 이순신은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올곧은 성격탓에 승진에서 여러 차례 누락하면서 변방을 전전한다. 임진왜란이 터지면서 정읍 현감이던 그를 전라좌수사로 발탁한 게 유성룡이었다. 벼슬이 종6품에서 종3품으로 6단계나 수직상승했다. 주위의 반대가 컸던 건 불문가지다.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조정에서 이순신을 추천해주는 사람이 없어서 무과에 오른 지 10년이 되도록 벼슬이 승진되지 않았다"며 안타까워했다. 유성룡의 발탁인사가 없었다면 임진왜란에서 조선을 지켜낸 충무공은 역사에서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두 사람의 우정이 잘 알려지지 않은 데 비해 관중과 포숙아의 우정은 귀에 못이 박히도록 잘 알고 있다.

춘추시대 초 성군(聖君)중 한 명으로 꼽히는 제나라 환공은 자신에게 화살을 날렸던 관중을 전격 기용,경쟁 제후국들을 깜짝 놀래킨다. '깜짝 인사'는 두 사람의 우정이 배경이었다.

죽마고우였던 관중과 포숙아는 대권후보가 난립하던 시절 다른 길을 걷는다. 포숙아가 보필하던 환공이 대권을 잡으면서 관중이 목숨을 부지할 수 없는 처지가 됐을 때 포숙아가 유명한 추천사로 관중을 구해낸다. "제나라만 다스리시려면 저 정도로 충분하지만 패자가 되어 여러 제후를 통솔하는 우두머리가 되고 싶다면 관중 없이는 안 됩니다. 그러니 지난 원한을 잊어버리고 관중을 과감하게 발탁하십시오." 환공은 포숙아의 말을 듣고 지난 날의 묵은 원한을 깨끗이 지우고 관중을 발탁한다. 두 사람의 우정을 다룬 '관포지교'는 사마천이 쓴 '사기'가 원전(原典)이다.

2500년 전 중국 대륙에서 벌어졌던 스토리는 잘 알고 있으면서 500년도 안된 이땅의 살아있는 스토리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왜 그럴까. 구한말과 일제시대, 6 · 25전쟁과 경제의 고속성장기 등을 거치면서 문사철(文史哲)의 뿌리가 흔들린 탓이다.

문사철엔 조상의 DNA가 고스란히 축적돼 있으며,무한복제가 가능하다. 인의예지를 가르친 공자는 맹자가 발전 계승했고,명나라의 주자,조선의 퇴계 율곡을 거치면서 동양학으로 거듭났다. 유성룡이 이순신을 발탁한 걸 정치 · 역사의 눈으로만 볼 일은 아니다. 두 사람의 우정을 현재화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게 요즘 회자되는 '스토리텔링 비즈니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