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영자금 바닥나 공사 못할판…해외수주도 차질
"발행수수료는 1년치를 미리 받아가더니 만기 3개월짜리 기업어음은 6개월 만에 몽땅 갚으라니 해도 너무한 것 아닙니까?"
대형 A건설사의 자금담당 K 상무는 요즘 앞뒤 따질 것 없이 자신들의 잇속만 챙기는 증권사만 생각하면 울화통이 치민다. 아파트 공사를 위해 모 증권사로부터 700억원 규모의 PF(프로젝트파이낸싱) 대출을 받았는데 당초 약속과 달리 자산유동화기업어음(ABCP)의 만기연장이 갑자기 끊겼기 때문이다.
증권사가 3개월 단위로 금리를 조정해가며 1년간 자금을 빌려주겠다고 문서로 약정하면서 발행 당시 2.3%의 발행수수료까지 챙겨놓고 이제와서 "어려운 건 건설사 사정이고 우리도 어렵다"며 태도를 돌변했다는 것.
이 회사는 하청업체에 줄 아파트공사비와 자재비 같은 통상적인 어음 결제에만 매월 3500억원을 집행하는 등 한 달에 5000억원의 현금을 확보해야 한다. 최근 석 달간 ABCP 2380억원을 증권사에 갚는 바람에 연말 자금운용 스케줄이 꼬였다.
K 상무는 "그동안 금융회사들이 경쟁적으로 PF 대출을 독려하며 경쟁적으로 대출에 나설 때는 언제고 지금 와서 약정만기가 돌아오지도 않은 채권까지 앞당겨 회수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건설업체들이 금융권의 무차별적인 PF 대출 회수로 자금운용은 물론 공사진행에 큰 차질을 빚고 있다.
자금난을 겪는 중견 B건설사의 한 임원도 "대통령은 금융권에 기업 자금지원을 독려하고 있지만 일선 창구에 가보면 분위기는 딴판"이라며 "한 증권사가 '내년 4월까지 약정된 ABCP를 이유 불문하고 상환하라'고 요구해 생존을 위협받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또 다른 중견 C건설사 관계자는 "운전자금용 현금이 4000억원 있지만 약정기간이 남은 채무까지 수일 내로 갚으라고 압박하는 상황에서는 언제 회사 문을 닫아야 할지 알 수 없다"며 "건설사들이 무너지고 나면 은행의 국제결제은행(BIS) 비율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 목청을 높였다.
건설업계 관계자는 "대형 건설업체일수록 해외시장에서 수주 및 수금에 관한 신용확보가 가장 중요한데 상환 압박이 들어오면 시행사의 부도 등을 우려해 일단 돈을 갚을 수밖에 없다"며 "특단의 대책이 고려되지 않으면 건설업체들의 줄도산이 현실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은행을 비롯한 금융회사들이 이렇게 만기가 돌아오지도 않은 채권 확보에 열을 올리고 있는 이유는 금융회사 역시 단기채무 상환 압박에 직면해 있기 때문이다.
채무 상환 압박에 시달리는 건설사들은 해외시장에서의 신인도 하락을 가장 두려워하고 있다. 대형건설사 D사 관계자는 "대형 건설사들은 그동안 PF사업을 진행하면서 대부분 영세 시행업체에 지급보증을 서 놓았다"며 "때문에 관련 시행사가 금융 회사의 채무 상환 압박에 대처하지 못하고 부도가 나면 건설사가 해외시장에서 신인도 하락으로 큰 타격을 받는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정부가 기준금리를 잇따라 내리며 시중에 유동성을 제공하고 있는 반면 건전 기업들마저 채무 상환 압박을 받고 있으니 정부의 경기부양 의지가 공염불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장규호 기자 danielc@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