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혈 군주,옹정제 앞에 급히 불려온 촉망받는 관료 둘은 몸부터 떨었다.
"지난밤 그대들은 무엇을 했는가." 용안은 감히 쳐다보지도 못한 채 주저하듯 대답한다.
"좀 늦도록 마작을 하고 놀았습니다." 즉각 이실직고하지만 황제는 여전히 굳은 얼굴이다.
"그래?… 별일은 없었나." 망설임 끝에 대답이 나온다.
"특별한 일은 없었고 마지막에 패가 한 짝 없어져 이상하다 생각하며 판을 거뒀습니다." 그제서야 옹정은 한 쪽 소매에서 뭔가를 꺼내 그들에게 내던진다.
간밤에 감쪽같이 사라졌던 바로 그 패다.
젊은 관료들은 국사에 전념하지 않는다고 나무라는 황제의 의중을 간파하고 더 낮게 엎드린다.
이월하의 대하소설 '옹정황제' 중 한 장면의 재구성이다.
정보력과 정보의 힘이 나라를 통치하는 데 얼마나 중요하고 그 효용이 큰지를 보여주는 옛 사례다.
물론 절대군주 체제에서의 이런 일을 현대국가,민주사회에 적용할 수도 없고 직접 비교해서도 안 된다.
그렇더라도 과거나 현재 할 것 없이 나라를 유지.발전시키는 데 가장 중요한 요건의 하나가 정보 관리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국가 간 산업 경쟁,정보 전쟁이 갈수록 치열해지는 현대국가에서 바람직한 정보기관의 역할은 무엇일까.
그동안에도 끊임없이 제기돼 온 화두이자,민주화.산업화시대를 지나 정보화시대로 넘어온 오늘날 더욱 절실하게 해답이 요구되는 문제다.
한국의 최고 국가 정보기관인 국정원의 미래상을 규정하기 위한 얘기이기도 하다.
노무현 정부 때 국정원은 어땠나.
원장의 대통령 주례보고,독대보고부터 먼저 사라졌다.
"정보기관이 홀로 서도록 하겠다"는 방침 때문이었다.
최정예 정보기관인 국정원의 보고서는 일반 행정부처의 엇비슷한 보고서들 가운데 하나로 평가절하됐다.
이렇게 되니 비공식 자리에서 대통령이 우방국에 대해 가감없이 논평한 민감한 내용이 상대국에 흘러가는 상황이 벌어진다 해도 제대로 수습하는 일조차 어려워졌다.
국가 정보기관이 정치적으로 이용되지 않도록 한 것은 무엇보다 바람직한 성과였으나,따지고 보면 이 같은 위상 저하가 무한대의 글로벌 정보전에서조차 국정원이 별로 뛰지 않게 된 요인으로 작용했는지도 모른다.
물론 국정원은 2003년 국가사이버안전센터를 세우는 등 국가 주요 산업에 대한 보안을 우선적인 업무로 보고 있다.
이런 과정을 통해 2002년 이후 국정원이 적발한 산업스파이는 100건이 넘는다.
유출시 발생할 예상 피해액도 100조원 이상이라는 게 국정원의 자체 추산이다.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는 첨단 산업시대에 발맞춰 나름대로 변신하는 모습으로 평가할 만하다.
엊그제 이명박 대통령이 김성호 원장에게 새 정부 국정원의 방향키를 맡겼다.
대통령은 정치적 중립을 명확히 보장하면서도 국가 간 정보전쟁에 전력하도록 과연 어떤 식으로 국정원을 100% 가동시킬 것이며,김 원장은 이에 효율적으로 부응할 것인가.
국가 간에 총성없는 경제전쟁과 기술전쟁이 어느 때보다 첨예한 상황이다.
산업스파이를 쫓고 공공기관으로 침입하는 정체불명의 해커를 막는 한편 복잡한 외교무대에서 묵묵히 우리의 국익을 지키는 것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무한 경제전쟁 시대 국정원의 업무 방향은 정해져 있다.
huhw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