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벽은 무너지고 강물은 풀려'로 시작해 '한 많고 설움 많은 과거를 묻지 마세요'로 끝나는 나애심씨의 노래가 발표된 건 6·25의 상처가 채 아물지 않은 1958년.내일 일을 기약할 수 없는 전쟁의 소용돌이 가운데서 살아남기에 급급했던 많은 이들에게 과거는 지울 수만 있다면 지우고 싶은 흔적 자체였을 것이다.

전쟁 뒤도 아닌 지금 과거를 지우려는 이들이 많다고 들린다.

개인 블로그나 미니홈페이지 등을 통해 생김새 혈액형 학력 등 온갖 걸 공개하던 젊은 누리꾼들이 신상 정보는 최소화하고 게시판과 방명록을 없애는 등 전력 삭제 내지 가공에 나섰다는 것이다.

취업준비생은 학생운동 경력을 지우고,연인과 헤어진 이들은 옛사랑의 자취를 없앤다고 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드러내기의 부작용'에 놀란 것이다.

인터넷 정보는 내가 봐주기를 원하는 이들만 보는 게 아니라 그렇지 않은 사람도 본다.

블로그나 미니홈피,커뮤니티는 서류에 없는 신상정보를 드러낸다.

미니홈피는 실명제로 돼 있는데다 '1촌평'이나 방명록을 남긴 사람의 홈피로 연결되게 돼 있어 당사자 홈피에 없는 사실까지 알게 해준다.

결국 미니홈피를 살피면 교우관계와 성격은 물론 평소 누구를 만나고 생각과 버릇은 어떤지까지 몽땅 나타난다.

미니 홈피에서 주고 받은 편지는 사신(私信)이 아닌 공개편지가 된다. 이런 사실을 간과한 채 모든 걸 펼쳐 놓던 이들이 기업의 인사담당자나 친지들이 인터넷 정보를 이용해 자신의 인성과 태도를 파악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과거 삭제나 가감을 통한 증거 인멸(?)을 시도하는 셈이다.

드러내는 재미,알려야 하는 필요에 급급하면 앞뒤 안가리고 초도 치고 살도 붙인다.

신념에 매이면 다른 시각과 가치관이 존재할 수 있음을 인식하지 못한다.

눈앞의 결과를 위해 부풀리고 포장했던 것들,내 생각만 옳다고 믿어 남을 향해 휘둘렀던 창칼이 부메랑처럼 돌아와 자신을 겨누게 될 걸 짐작하지 못한다.

스스로 밝히고 주장했던 사실이 목을 조일 때에야 "과거를 묻지 말라"며 지워보려 하지만 지나치게 부풀렸거나 떠벌린 경우 없애기는 쉽지 않다.

정보 삭제와 윤색을 통해 좋은 것만 알린다지만 인터넷 정보란 한번 띄우면 삭제해도 언제 어디서 불쑥 나타날지 모른다.

제멋대로 복제되고 움직이는데다 누리꾼들은 감춰진 걸 찾고 훔쳐보는데 도사이기 때문이다.

지방선거가 끝났다.

당선자 가운데 어떤 이는 선거 전의 이력이나 약속을 슬쩍 바꾸거나 삭제하려 들지 모른다.

"기억이 잘 안난다"거나 "상황이 바뀌었다"면서.그러나 세상은 변했고 지켜보는 눈 또한 많아진 만큼 쉽지 않을 것이다.

개인과 조직 할 것 없이 때로 과대 포장하거나 지킬 가능성이 낮은 약속을 할 수 있다.

그러나 한번 내보였던 모습,기약했던 일을 없었던 걸로 하기는 점점 어려워진다.

본의든 아니든 자신과 남을 속이는 일을 줄이자면 당장의 성과에 연연해 지나치게 덧씌우고 보태지 말아야 한다.

강을 건넌 다음엔 타고 온 뗏목을 버려야 할 때도 있다.

내일을 생각한다면 뭐든 너무 많이 포장하고 '나만 옳다'고 우기지 마시길.일단 띄워놓으면 나중에 아무리 "과거를 묻지 마세요" 애걸해도 소용없을 테니.

박성희 논설위원 psh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