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2006.04.04 10:26
수정2006.04.04 10:28
1968년 초, 한국도자기는 서울 명동 신사조빌딩에 '서울 사무소'를 냈다.
크기라야 네 평이었고 직원도 고작 여직원 한 명이었다.
규모야 말 그대로 코딱지 만했지만 1959년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아버지의 부름으로 고향 청주의 한국도자기에 입사한 이래 꼭 10년만의 서울 입성이었다.
상대를 졸업한 후 교수가 되려는 꿈을 접고 그릇과 함께 묻혀 산 10년 세월은 정말 사금파리 위를 맨 발로 걷는 듯한 고난의 연속이었다.
생산설비라곤 장작불을 때서 굽는 벽돌가마가 고작이었고 기술은 적당히 구워낸 초벌구이 수준이었다.
게다가 회사는 2백여장의 사채카드를 가진 빚 투성이로 매출의 40%가 이자로 나가는 판이었다.
그런데도 신용 하나를 밑천으로 70여명의 직원과 살림을 꾸려 나가고 있는데 문제는 품질이었다.
"제품이 이게 뭐요?"
그릇도매상들은 결제를 해주는 것은 고사하고 그런 이야기를 툭툭 뱉아냈다.
제품을 깔보는 말투가 비수로 가슴을 에는 것 같았다.
25가지나 되는 공정에 정성을 들인다고는 하지만 가마의 한계는 극복할 수 없었다.
'1천2백도를 낼 수 있는 현대식 소성로 하나만이라도 있었으면….'
그렇게 간절히 기도했지만 사채도 못 갚는 터에 현대식 가마는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런데 말 그대로 기적이 일어났다.
우리 식구가 다니던 청주서문교회의 헌당식이 있던 날, 선교사 엘마 길보른이 캐나다에서 보내온 기독실업인 지원자금 2만달러를 대여해준 것이다.
나는 이 자금으로 선진국의 최신식 소성로 4기를 도입했다.
그리고 세계적인 도자기회사 로열 덜톤(Royal Doulton) 그룹 산하 존슨 맷시 회사와 '황실장미' 전사지(轉寫紙, 인쇄 화지) 공급계약을 맺었다.
'황실장미'는 1963년부터 한국도자기가 내놓은 브랜드였는데 품질이 좋지 않아 인지도가 낮았다.
그런데 최신식 설비에 최고급 전사지로 처리한 신제품 황실장미 홈세트가 출시되자 그야말로 불티나게 팔려 나갔다.
지인의 도움으로 워커힐을 비롯한 각급 호텔에 납품도 할 수 있게 되었다.
"수출을 하자!"
내수판매에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자 나는 수출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경제학을 공부했던 나는 무역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고, 인구가 적은 우리나라의 시장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직감하고 있었다.
1968년 어느 날, 무역대행을 맡고 있는 한국교역에서 연락이 왔다.
태국의 바이어가 샘플을 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우리 회사의 최고급품을 보여주며 계약을 유도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첫 계약은 쉽지 않았다.
기독교 신자로서 술을 먹으면 안 되지만 술자리를 마련하기도 했다.
그러한 노력의 결과로 10만달러의 수출고를 기록하게 되었고, 그 해에 총 수출액이 45만달러에 이르렀다.
'황실장미'가 성공을 거두자 후발업체들이 이를 모방한 제품을 가지고 시장에 뛰어들면서 과당경쟁이 예상되었다.
기술개발만이 살길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터에 때마침 유엔개발기구(UNDP)에서 보내주는 경제시찰단에 선발되었다.
마침내 경제시찰단은 1971년 10월 하순 호주 시드니에 도착했다.
한 백화점에서 나는 눈이 번쩍 뜨이는 물건을 발견했다.
자줏빛 시트 위에 투명하면서도 부드러운 유백색 자태를 드러내고 있는 우아한 자기 하나.
품위 있으면서도 만지면 날아갈 듯한 신비한 질량감이 내 혼을 빼놓고 있었다.
"이게 뭡니까?"
"오, 본 차이나(Bone China)!"
가격을 물어보았다.
종업원은 무려 20달러라고 답했다.
'커피잔 하나에 20달러라니 우리 제품의 20배가 아닌가?'
부족한 여행경비를 쪼개고 쪼개어 그 커피세트를 샀다.
호텔로 돌아와 그 커피세트를 만져보고, 멀리 놓아보고, 맛보고 그렇게 밤을 하얗게 지샜다.
"바로 저거다. 본 차이나를 만들어야 한다."
서울로 돌아와 여러 경로를 통해 본 차이나의 제조 방법을 알게 되었다.
잘 정제된 젖소뼈 50%, 점토 25%, 도석 25%를 원료로 하여 철분과 공기를 완전히 제거한, 그야말로 '꿈의 도자기'였다.
당시 생산지는 영국 독일 일본 뿐.
일본에서는 요업의 명문 나고야 공업연구소에서 만들고 있었다.
황급히 일본으로 날아갔다.
"하하! 한국에서 이것을 만들겠다구요? 우리는 영국에서 기술을 도입한지 30년 만에 이를 성공시켰는데 기술도 없는 한국에서 어떻게 성공하겠어요?"
다행히 연구소의 수석연구원이 제조 방법을 자세히 가르쳐 주었다.
그렇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했다.
이번에는 영국으로 날아가 영국 도자기의 2대 명가(名家)인 로열 덜톤과 웨지우드를 방문했다.
그런데 이들은 바늘구멍 하나 들어가지 않았다.
기술이전에 회의적이었다.
개발비로 40만달러를 요구했다.
나는 세계시장과의 아득한 거리감만 느끼며 풀이 죽은 채로 귀국해야 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2년 후인 1973년 말, 청와대의 전폭적 지원과 덜톤 그룹 산하 크레스콘사의 기술제공으로 한국도자기는 드디어 꿈에 그리던 본차이나 개발에 성공했다.
본 차이나의 개발 성공으로 자신감을 얻은 한국도자기는 1976년 12월 충북 청주시 송정동에 연건평 3천2백10평의 수출 제1공장을 준공했다.
이 무렵 나는 부지런히 해외를 돌아다니며 판로를 개척하였다.
그렇지만 영국 독일 일본 제품이 강세를 이루고 있어 일단 '메이드 인 코리아'라고 하면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나마 애써 따온 물량도 OEM(주문자 상표부착생산) 방식이었고 이마저 많은 물량이 아니었다.
1968년에 10만달러의 수출액을 기록한 이래로 1976년 86만달러로 강산이 한 번 변한 10년 동안에 받은 성적표는 초란한 것이었다.
기술개발에 의한 신상품 출시 없이는 세계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통감하여 1977년 일본의 상고 차이나와 기술 및 판매제휴를 맺었고, 이어서 노리다케와도 기술협력을 맺었다.
상고(春日) 차이나와 제휴를 맺은 첫 해, 자기들이 미국에 수출하는 물량의 10%를 우리에게서 가져갔다.
이 비율은 해마다 늘어나 1982년에 가서는 90%를 우리에게서 가져가는 형국이 되었다.
이때 우리 제품을 세계시장에 직접 팔아야겠다는 결심을 굳히게 되었다.
1984년 1월 다시 미국 애틀랜타의 "국제도자기 쇼"에 참가했다.
다소 긴장되긴 했으나 이번에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다.
결과는 4백20개사 참가 제품중 품평순위 20위.
세계 최고는 아니었지만 선두권에 진입한 것이다.
이후 마케팅에 열중했다.
그런데 행사 마감 결과 우리의 계약 실적이 세계 1위를 차지한 것으로 집계되었다.
6년 전에 당한 치욕과 서러움을 일시에 만회하는 순간이었다.
세계적인 권위지 시카고 트리뷴은 우리를 "도자기의 여왕"으로 칭하며 대서특필했다.
이 기세를 몰아 그 해에는 드디어 1천만달러의 수출실적을 거두었다.
1999년부터는 교황청 식기 납품업체로 선정되었으며 노벨상 만찬장 식기도 공급한 바 있다.
최근에는 초고가 브랜드인 '프라우나'를 개발해 고가품 시장을 공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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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동수 회장 약력 ]
36년 충북 청주시 남주동 출생
59년 연세대 상경대 경제학과 졸업
59년 한국도자기(주) 입사
68년 대한도자기공업협동조합 이사
84년 한도통상(주) 회장
84년 수안보파크호텔(주) 회장
90년 한국도자기(주) 회장
91년 경찰청 초대 경찰위원
91년 바르게살기운동 중앙협의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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