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사의 나라에서 동토까지-. '메이드 인 코리아(Made in Korea)'를 들고 세계시장을 누벼온 한국의 수출전사들. 그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40년 전 고작 8천만달러에 불과하던 한국의 수출은 이제 2천억달러 고지 돌파를 눈앞에 두게 됐다. 가난에 찌든 한국을 선진국 문턱까지 끌어올린 이들을 우리는 '수출영웅'이라고 부른다. 한국경제신문은 오는 30일 무역의 날 40주년을 맞아 한국무역협회와 공동으로 무역인들의 땀과 눈물, 그리고 희열의 순간을 되돌아보는 '한국의 수출영웅…우리는 이렇게 뛰었다' 기획시리즈를 자필 수기로 연재한다. < / 편집자 > ----------------------------------------------------------------- 속옷사업을 막 시작한 1960년대 어느 해로 기억된다. 해외 출장을 나가 독일 프랑크푸르트공항 세관 검색대를 통과할 때였다. 세관원이 가방을 검색하다 말고 아주 기분 나쁜 눈빛으로 나를 힐끔 쳐다보는 것이었다. "왜 그러십니까?" 가방 속에 문제될 만한 물건이 하나도 없었던 터라 따지듯 자신있게 물었다. "당신 혹시 이상한 사람(정신이상자) 아닙니까?" 세관원은 자신의 관자놀이에 손가락을 대고 한두 차례 원을 그렸다. 날보고 미친 놈이라니…. 동양인이라고 무시하나 싶어 화가 머리 끝까지 솟구쳤지만 다음 순간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내 트렁크 속에 형형색색의 여자 속옷이 가득 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반듯하게 생긴 신사의 트렁크에서 브래지어와 팬티가 한두 장도 아니고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으니 기겁할 수밖에. 세관원은 나를 변태성욕자쯤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변태 아니냐는 오해까지 받아가며 외제 란제리 샘플 수집에 매달렸던 것은 해외시장 개척에 대한 굳은 의지 때문이었다. 처음 브래지어를 만들 때부터 나는 국내보다 해외 시장을 겨냥했다. 국내 시장 30%, 해외 시장 70%라는 전략을 세워 시장 공략에 나섰다. 해외 시장 개척은 처음부터 해프닝의 연속이었다. 역시 독일에서 있었던 일이다. 현지 바이어를 찾아가 속옷 샘플을 보여주고 정중하게 구매를 요청했다. 독일 바이어는 어처구니가 없어 말이 안 나온다는 표정이었다. "여보세요. 이 란제리는 우리 회사에서 개발한 디자인입니다." 개발회사에다 대고 카피제품을 사달라고 했으니, 실수도 그런 실수가 없었다.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을 만큼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러나 독일까지 가서 그대로 물러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우리의 제조 능력이 그만큼 뛰어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당신네 회사를 찾아온 것이라고 둘러댔다.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그 바이어는 우리의 제조 능력에 감탄했다며 물건을 주문했다. 한 해 2천4백만장의 속옷을 수출하는 지금 돌아보면 격세지감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나일론 원단을 생산하는 공장을 운영하다 보니 자연 의류사업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원단만 만드는 것보다 가공해서 제품을 팔면 좋을 것 같았다. 그래서 궁리 끝에 스타킹을 생산하기로 계획했다. 돌이켜 보면, 여성 속옷만 가지고 사십 수년 넘게 사업을 했다. 속옷을 사업 아이템으로 선정한 이유는 의외로 단순한 것이었다. 당시 국내에서는 여러 회사들이 의류를 생산하고 있었는데 그들과 경쟁에 자신이 없었다. 이른바 패션이라는 것은 너무 빨리 바뀌어 기복이 심할 뿐만 아니라 그 흐름을 따라잡기가 여간 어려운게 아니었다. 그래서 보다 느리게 변하는 속옷을 선택했던 것이다. 요즘은 속옷도 유행에 따라 빠르게 변화하지만 당시에는 이너웨어에 패션이라는 개념이 가미되지 않았다. 1960년대 초까지 시중에 나와 있는 스타킹은 '피시넷(fishnet) 스타킹'이라는, 망사처럼 생긴게 주류였다. 말 그대로 어망처럼 작은 구멍이 송송 나 있어 속이 훤히 비쳤고 제조 과정에서 단번에 원통형으로 짜내지도 못했다. 일단 평면으로 짠 다음 바느질로 꿰매 완성품을 만들었다. 그러다 보니 스타킹의 위에서 아래로 발바닥까지 다리 뒷면에 재봉선 자국이 그대로 남았다. 1963년 어느 날 이탈리아에서 두 명의 손님이 나를 찾아왔다. 그들은 로나티(LONATI)라는 회사를 경영하는 아버지와 아들이었다. 로나티는 스타킹 편직기를 생산하는 세계적인 이탈리아 기업이었다. "스타킹에는 재봉선이 없어야 여성의 다리가 예쁘게 보입니다. 당신이 만드는 스타킹은 재봉선 때문에 여성의 매끈한 다리를 제대로 보여주지 못합니다." "재봉선 없는 스타킹을 어떻게 만들어요?" "심리스 스타킹이라고, 재봉선 없는 스타킹을 짜는 기계가 있습니다." 로나티 부자는 자신들이 가지고 온 견본을 보여주었다. 나는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리 짠 천으로 스타킹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기계에서 바로 둥근 모양의 재봉선이 없는 완제품이 나오는게 아닌가. 그 신기한 견본을 보는 순간 나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 자리에서 심리스 스타킹 기계를 17대 주문했다. '심(seam)'이란 '솔기'란 뜻이므로 '심리스(seamless)'는 '솔기가 없는 스타킹'을 뜻한다. 이 기계를 한국에서 최초로 내가 도입했다. 재봉선이 감쪽같이 사라진 스타킹은 한국 여성들 사이에 인기가 대단해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밀리는 주문을 대기 위해 심리스 스타킹 기계를 계속 수입했다. 불과 몇 년도 안 돼 기계는 무려 50대로 늘어났다. 나는 심리스 스타킹을 일본이나 홍콩으로 수출하고 싶어졌다. 수출물량을 생산하려면 기계가 더 필요했다. 하지만 기계 값이 너무 비싸서 엄두를 못내고 있었다. 마침 그때 일본 이토추상사의 소개로 미나미 나이론회사의 미나미 히데미스 사장을 알게 되었다. 미나미 사장은 나의 사업이 잘되는 것을 보고 합작을 제의했다. 1970년 내가 50%, 미나미 사장이 30%, 이토추상사가 20%의 지분으로 충남 천안에 합작회사 '남남나이론'을 설립했다. 심리스 스타킹 기계 1백40대를 들여온 뒤 일본과 홍콩 수출에 나서게 되었다. 수출을 시작한지 얼마 안 돼 우리 스타킹은 홍콩시장에서 30%의 점유율을 차지했다. 당시 수출액은 1백만달러를 상회했다. 1960년대 당시 가장 큰 시장은 미국이었다. 여성 의류는 품이 많이 드는 공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인건비가 비싼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단가가 맞지 않았다. 따라서 자체 생산보다 수입에 더 의존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당시 미국의 여성 속옷 시장은 대부분 일본이 점유하고 있었다. 그때까지 일본은 인건비가 그리 비싸지 않은 편이었다. 미국에서는 일본을 비롯해 홍콩, 필리핀 등에서 생산된 제품이 많이 나갔고, 유럽 시장은 홍콩과 대만 제품이 많이 팔렸다. 일단 미국 시장을 공략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일본이 일찍부터 터를 잡고 있던 미국 시장에서 후발주자로 뛰어들어 경쟁을 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외국 여성들의 체형에 맞는 속옷을 만들기 위해 미국은 물론 유럽의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샘플을 사들였다. 특히 외국 여성의류 회사를 열심히 찾아다녔다. 그 회사의 전시실에 진열해놓은 신제품을 발견하면 그때마다 수첩에 스케치했다. 프랑스 파리 패션가의 란제리 전문점 쇼윈도를 앞에 두고서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있을 때였다. "당신 지금 거기서 뭐하는 거요?" 날카로운 프랑스 말이 등골을 찍어내렸다. "보시다시피 사진을 찍고 있습니다." 란제리 매장의 매니저로 보이는 그 사람은 손을 가로저었다. 사진을 찍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림이라도 안 되겠습니까?" 그는 마지못해 허락했다. 아예 쇼윈도 앞에 주저앉아 수첩을 펴놓고 마네킹에 입혀진 브래지어, 거들, 팬티를 차례차례 그려나갔다. 그림 솜씨는 형편없지만 우리 회사 디자이너가 알아보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무엇보다 정밀하게 그리는 것이 중요했다. 우리 직원들은 그런 나를 두고 '왕디자이너'라고 불렀다.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눈물 없이 말할 수 없는 갖가지 일을 겪었지만 피나는 노력 끝에 수출은 꾸준히 늘어났다. 1980년대 미국에 연간 8백만 장을 수출하는 기록을 세웠다. 미국 여성 열 명 중 한 명이 비비안 제품을 입고 다닌다는 계산이었다. "비비안이 만든 브래지어가 저희 회사를 살렸습니다." 속옷은 겉옷과 다르다. 여성의 몸매를 다듬어주는 기능성도 있어야 하고, 겉옷을 입었을 때 바느질 자국이 드러나면 안 된다는 것도 알았다. 제품의 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체계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우리 회사의 디자이너와 생산직 근무자들을 선진기술을 가진 일본 속옷업체에 보내 봉제기술과 선진화된 패션을 배워오도록 했다. 요즘에야 기업들이 직원들을 해외에 내보내 연수시키는 게 예삿일처럼 되어 있지만 당시 중소기업으로서 그 같은 결정을 하기까지는 나름대로 대단한 각오를 필요로 했다. 우리 회사 디자이너들은 대부분이 대학에서 가정학을 전공한 여직원들이었다. 그들은 대학에서 옷 만드는 기술을 배워오기는 했지만 속옷에 관한 지식은 초보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속옷을 어떻게 디자인하고 바느질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제대로 아는 이가 없었다. 우리는 하루에도 몇 차례씩 회의실에 모이곤 했다. 내가 해외에서 대충 그려온 란제리 그림과 외국에서 사 모은 샘플들이 유일한 교과서 노릇을 했다. 이 자료들을 테이블에 쭉 늘어놓고 디자인은 물론 바느질 기법까지 하나하나 눈으로 익혔다. 한번은 독일을 방문하여 그곳 바이어에게 샘플을 내밀었다. 그 독일 바이어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더니 갑자기 마구 웃는 것이었다. "이것은 우리 회사에서 개발한 디자인입니다." 제품 디자인을 카피해 개발사에 물건을 팔려고 했으니 웃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의 제조능력이 그만큼 뛰어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만든 것이라며 어물쩡 넘어갔지만 얼굴이 화끈거렸다. 바이어는 제조 능력에 감탄했다며 그 자리에서 주문까지 해주었다. 지금도 나는 비비안 회장으로서 외국 바이어를 만날 때 사용하는 명함에는 직함이 없다. "실례지만 직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저는 회사를 대표하는 세일즈맨입니다." 지금도 나는 세계 여성의 몸을 감싸기 위해 해외시장을 돌고 있다. 일흔 여덟이 넘은 나이지만 일을 하는게 가장 큰 행복이기 때문이다. 우리 회사 제품을 파는 일이라면 나이와 공간이 넘지 못할 벽이 되지 못한다. "나는 영원한 세일즈맨이다." ----------------------------------------------------------------- [ 남상수 회장 약력 ] 1925년 경북 영양 출생 1964년 건국대 정경학부 상과 졸업 1966년 일본 고베대학 대학원 경영 학과 수료 1954년 남영산업 설립 1957년 남영염직(현 남영L&F) 설립 1989년 인도네시아 PT남남패션 설립 1992년 중국 청도남남유한공사 설립 1973년∼1997년 무역협회 부회장, 대한상공회의소 상임위원 1991년∼1997년 한일경제협의회 부회장 ----------------------------------------------------------------- 알림 =수출시장개척 활동과 일화를 공유하고 싶은 무역인들은 한국경제신문 산업부 대기업팀(02-360-4183, kbi@hankyung.com)이나 한국무역협회 국제통상팀(02-6000-5194, hockey@kotis.net)으로 연락바랍니다. 시리즈로 게재된 내용은 단행본으로 출간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