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경영'을 추구했던 만큼 대우그룹을 지탱했던 숫자의 세계 역시 세계적 네트워크를 필요로 했다. 이 네트워크의 중심점에 다가서지 않고는 대우 세계경영의 본질을 알 수 없다. 지구촌에 산재한 수백개 공장과 현지법인들을 하나로 묶는 자금의 연결고리, 회계처리의 패스워드는 과연 무엇인가. 우리가 '비밀의 BFC'라고 부르는 것, 그것에 대한 지식이 없다면 대우의 흥망성쇄도 다만 하나의 난수표에 불과할 터이다. 기업회계기준이나 외환관리법은 세계경영의 지난한 장애물이었지만 대우는 BFC를 통해 그 올가미를 간단하게 뛰어 넘었다. '비밀의 BFC'가 없었다면 대우의 세계경영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가장 비밀스러웠던 장소가 바로 코드명 'BFC'로 불렸던 '영국 금융센터', 즉 British Finane Center였다. 사실 대우사태가 불거지기 전에 이 BFC의 존재를 알고 있던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취재팀은 이제 그 비밀의 장소로 접근할 차례다. ● 첫 손님 2000년 3월 중순. 김포공항 국제선 청사에 금융감독원 대우조사 특별반장인 이성희 국장과 일단의 조사요원들이 모여들었다. 회계사 자격증이 있는 이 분야 전문가들 외에 (주)대우 회계담당 직원 1명이 어울리지 않는 일행으로 동행할 참이었다. 일행 7명은 8박9일 일정으로 런던으로 떠나는 중이었다. "갑갑했습니다. 말이 특별조사반이지 런던 BFC에 회계장부나 제대로 갖추어져 있는지부터가 걱정이었습니다" 이 국장의 마음은 천근처럼 무거웠다. 도저히 풀리지 않는 마법의 해(解)를 향한 여정이었다. 비행기는 10시간을 날아 히드로 공항에 도착했다. 오후 5시쯤 됐지만 이미 날은 어두웠다. 창 밖에는 부슬부슬 밤비가 내리고 있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우산을 받쳐든 최재식 금감원 런던사무소장이 이들을 마중 나왔다. 런던 서쪽 외곽에 있는 히드로 공항에서 북서쪽 미들섹스에 있는 (주)대우 런던현지법인까지는 차로 40분가량 걸렸다. 이 국장 일행은 평범한 5층짜리 건물로 들어섰다. 비밀 속에 가려졌던 BFC가 처음으로 외부 손님을 맞은 것이다. ● 아카이브 놀랍게도 이 건물은 한적한 주택가에 자리잡고 있었다. 여기에는 (주)대우뿐 아니라 대우 계열사 현지법인이 함께 들어 있었다. 다른 종합상사 같으면 시내 중심가에 자리를 잡았을 터였다. "5층짜리 건물 가운데 1개층을 (주)대우 런던현지법인이 썼습니다. 그 층의 절반정도는 BFC 관련 장부를 보관하는 장소(archive)였고요. 다행히 장부들은 비교적 잘 보관돼 있었습니다" 이 국장은 '다행히'라는 말을 몇번이나 되풀이했다. 베일에 싸였던 BFC는 이렇게 모습을 드러냈다. 특별조사는 BFC 전담직원들의 도움을 받으며 7일 밤낮으로 계속됐다. "BFC는 상부의 지시를 받아 대우그룹 해외법인들과 본사 또는 다른 계열사로부터 자금을 넘겨받고 넘겨주는 통제센터 같은 곳이었습니다. 97년부터는 분식회계가 극심했습니다" 이 국장은 마치 추락한 비행기의 블랙박스를 찾아내는 듯한 기분이었다고 회고했다. 이 국장은 BFC 장부들을 일일이 분류한 다음 서울로 실어날랐다. 서울에서의 정밀 작업이 뒤따를 것이었다. ● 블랙박스 취재팀은 금감원이 BFC 장부를 뒤져 해독해 놓은 내부문건을 단독 입수했다. 'BFC 항목별 손익요약표'가 담긴 이 문서에는 96,97,98,99년 등 4개 연도 BFC의 입출금 내역이 정리돼 있다. 자료에 따르면 96년 59억9천만달러(당시 환율로 5조6백억원)였던 BFC 입출금거래액이 99년엔 76억9천만달러(8조8천억여원)로 급증했다. 당연히 이 자금은 본사 회계장부에 한 건도 기재되지 않았다. 검찰은 매년 5조∼8조원에 달하는 이 돈을 합산해 대우가 BFC를 통해 25조원을 분식했다고 발표했다. 물론 이중 계산이 많았다. BFC로 들어 온 돈은 현지법인이 해외 금융기관으로부터 빌린 차입금이 대부분이었다. 이 역시 본사 장부에 기재하지 않은 부채(부외부채)였다. BFC가 (주)대우 본사로부터 빌려 온 돈도 꽤 됐고 대우자동차 현지법인과 건설부문으로부터 입금된 돈도 있었다. 검찰은 이 부분에 외화밀반출 혐의를 적용했다. 당연한 결과였겠지만 IMF사태가 터진 97년부터는 현지법인의 금융차입이 급격히 줄었다. 대신 본사와 대우자동차 현지법인으로부터 들어오는 돈이 많았다. 해외차입이 어려워지자 계열사들로부터 허겁지겁 돈을 당겼고 그만큼 분식회계가 불가피해졌다. 비밀의 숫자들은 이렇게 풀려나갔다. "문제는 조성된 자금의 사용처였어요. 불행히도 대부분이 금융비용이었습니다. 99년 한햇동안 외국 금융기관으로부터 빌린 돈에 대한 이자만도 24억9천만달러나 지출됐고요. 당시 연 5% 안팎이었던 리보(LIBO)금리를 감안하면 빌린 원금은 무려 2백억달러(23조원)가 넘었습니다" 이 국장은 자금난으로 고전하던 대우의 마지막 모습에 깊은 연민의 정을 느꼈다. 여기에 대출수수료와 외환차손까지 합치면 대우는 99년 한햇동안 76억9천만달러를 조달해 이중 35%를 이자갚는데 썼다. 나머지 금액 또한 해외계열사 손실을 메우는데 쓸어다 부었다. "대우자동차 관련 출금도 많았다. 해외 자동차법인 지원이나 손실보전 항목이 13억6천만달러에 달했고 나머지는 파키스탄 휴게소와 산동시멘트 미국현지법인 수단 우크라이나 등 무역부문이나 계열사인 중공업 통신 등에 대한 지원 또는 손실보전으로 지출된 것으로 파악됐다"고 조사반의 다른 관계자는 설명했다. 문제는 사용내역이 밝혀지지 않은 액수가 전체 지출의 10% 가량인 7억5천3백42만달러(8천6백20억여원)에 달한다는 것이었다. 당연히 의혹의 눈초리가 집중됐다. ● 마술 피리 BFC는 대우의 비자금 창구라는 인식이 퍼져 있다. 김우중 회장이 BFC 자금을 개인용도로 썼다는 의혹도 적지 않다. 물론 김 회장을 변론하고 있는 석진강 변호사의 설명은 전혀 다르다. "BFC는 (주)대우가 런던에 개설한 10개 가까운 계좌를 통틀어 부르는 이름일 뿐이다. 외환관리법상 절차를 밟지 않은 것은 잘못이지만 (주)대우의 정상적인 감독 아래 있었고 회계처리도 확실하다. 재산을 빼돌리기 위한 비밀계좌는 아니다" 어쨌든 금감원이 해독한 BFC는 세계경영을 꾸려 나가기 위한 '마술피리'임에는 분명했다. 끊임없이 돈을 빌리지 않으면 세계경영은 멈춰설 지경이었고 그 임무가 고스란히 BFC에 떨어졌다. 계열사로부터건 해외은행들로부터건 BFC는 부단히 마술처럼 돈을 만들어 내야 했다. [ 특별취재팀 =정규재 경제부장(팀장) 오형규 이익원 최명수 조일훈 김용준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