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시대 초(楚)의 대신 소양(昭陽)이 위(魏)를 쳐 대승하고 내친김에 제(齊)나라에 진군하려하자 제의 대신 진진(陣軫)이 찾아왔다. 그는 소양의 승전을 축하한 다음 물었다. "이제 대승을 거두셨으니 무슨 벼슬을 받게 됩니까" "상집규(上執珪)를 내리겠지요" "그 윗자리는 무엇입니까" "영윤(令尹)뿐이지요" "초왕이 영윤 같이 높은 자리를 둘씩이나 두겠습니까. 제가 장군을 위해 비유를 하나 들지요. 초나라에 어떤 귀인이 부하들에게 제사 술 한병을 내렸답니다. 귀한 술이므로 부하들이 내기를 하였습니다. '땅바닥에 뱀을 그려 가장 먼저 마치는 사람이 혼자 다 마시기로 하자' 그런데 한사람이 뱀을 남보다 훨씬 빨리,그리고 시간이 남아 발까지 그렸답니다. 그리고 술병을 잡자,그 뒤에 그림을 마친 사람이 '뱀에는 발이 없다. 이 그림은 가짜다'하고 병을 빼앗아갔습니다. 장군께서는 위나라를 쳐 성 여덟개를 빼앗았으니 이미 큰 공을 세우고 이름을 빛냈습니다. 제나라를 쳐서 이긴다고 벼슬이 더 오르지도 못할 것입니다. 싸워서 이길 것이라고 자만해,적당한 시기에 그칠 줄 모르다가 실패라도 한다면 몸만 망치고 상집규 자리도 남의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사족(蛇足)을 그리는 꼴이지요" 소양은 철군해 초나라로 돌아갔다. 최근 몇달 간 이른바 '한류(韓流)'라 하여 매스컴이 시끌벅적했다. 국토이건 문화이건 보잘것 없이 침략만 받아오던 나라인데,그 신세대 대중문화가 대륙을 흔들고 있다는 소문이니 얼마나 반갑고 자랑스러운 일인가. 신세대의 방종과 버릇없음만 탓하던 기성세대들은 무색하게 됐다. 뒷자리로 물러나 이들의 활약이나 감상하고 대견해해야 하는 것이 기성세대의 몫이다. 그런데 문화관광부가 이참에 해외에 한류체험관을 만들고 해외진출도 지원하겠다며 나섰다. 취지인즉 민간에 놔두면 무질서하게 개발돼 언제 사그러들지 염려되므로 경제적으로도 중요한 이 사업을 정부가 나서서 '육성'해 보존 발전시키겠다는 것이다. 그 동안 어디 정책의 보탬이 있어서 한류가 이처럼 번성하게 됐던가? 가만 놔두어 잘 이룬 사업에 기어이 손을 뻗쳐 키우겠다고 나서는 우리 정부의 태도에서 '뱀의 다리는 내가 그리겠다'는 욕심과 어리석음을 본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한류란 거침없고 방만하게 자란 우리 신세대의 문화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다.많은 한국의 자식들은 제 아이 기죽이지 않겠다고 무질서,방종과 낭비를 무조건적으로 허용한 이기적 부모 밑에서 기율 없이 자랐다. 이런 신세대의 유효수요를 좇아 TV는 이들 문화로 온통 도색됐고,자유분방한 신세대 대중문화가 번성할 토양이 형성됐다. 그리고 개방과 소득향상의 급격한 충격을 받은 사회주의국가의 젊은 세대가 이런 무제약의 문화에 일시적 동감현상을 보이게 됐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 한류를 규격화한 정책과 계획으로 진흥시키겠다니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정책지원은 그 틀에 따르는 문화공급을 유인할 것인데 이런 노래와 드라마로 이루어진 한류가 가당한 일인가. 또 다른 나라도 아닌 사회주의국가에 자본주의 대중문화를 진출시키는데 국가가 교두보를 만들겠다니 말이 되는가. 그나마 이루어진 문화수출의 터전도 잃을 일이다. 과거 허문도라는 사람이 있던 5공화국 때 국풍(國風)이라고 하여 청소년문화를 조성하겠다고 당국이 나선 바가 있다. 이런 비스마르크적(的) 국가사회주의 경향이 '민주화'를 입에 달고 있는 국민의 정부에서 가끔 노출되니 놀라운 일이다. 집권초기에는 '신지식인'바람을 유도한 바 있었고,최근에는 주5일 근무제 입법을 난데없이 문광부가 주도하고 나섰다.이번의 일에서도 노벨상을 받은 정부로서 대중문화에도 무소불위(無所不爲)하고 백성에게 맡기면 아무것도 안심이 되지 않는 가부장주의(paternalism) 정부의 본색이 엿보인다. 필자는 문외한이지만 문화란 수백년 영속하며 뿌리를 내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매스컴이 소란피우는 인기는 언제 변덕을 부릴지 모르는 유행(fad)에 불과하다. 이런 대중문화에 정부가 간여한다는 것은 어느 모로 보나 합당할 수 없다. kimyb@ca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