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은행의 손홍익 과장은 최근 할부금융사에 다니는 친구에게서 오랜만에 전화를 받았다.

친구는 대뜸 "은행에서 오토론을 하면 우리는 뭘 먹고 사느냐"고 볼멘 소리를 했다.

국민은행이 이달부터 자동차구입자금 대출을 시작한 것을 두고 한 얘기였다.

농담처럼 던진 말이지만 뼈가 있었다.

국민은행의 자동차 구입자금 대출은 할부금융사보다 금리가 2~3%포인트 낮은데다 수수료도 없어 할부금융사로서는 위기의식을 갖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저금리 추세가 지속되면서 금융기관간 고유 업무영역이라는 개념이 허물어지고 있다.

과거 벤처캐피털이나 할부금융사 상호신용금고들이 맡아왔던 틈새시장에 은행권의 진입이 활발해지고 있는 것이다.

제일은행은 신용금고들의 주력상품이었던 일종의 ''고리대(貸)'' 방식의 소액긴급자금대출에 뛰어들어 톡톡히 재미를 보고 있다.

이 은행 소매금융상품팀의 이종범 과장은 "50만원에서 7백만원까지를 무보증으로 연 13.9∼22.9%의 금리로 간편하게 빌려주고 있다"며 "대출고객이 많이 몰려 예상보다 좋은 실적을 거두고 있다"고 말했다.

이 과장은 "이런 고리의 긴급자금을 빌려쓰는 사람은 의외로 일반 급여생활자가 가장 많고 한 사람당 빌리는 액수는 평균 2백50만원 정도"라고 설명했다.

벤처캐피털 노릇을 하는 은행들도 있다.

한미은행 강남구 도곡중앙지점 이경수 과장은 지난 10일 대출을 해 줬던 한 업체로부터 반가운 전화를 받았다.

근거리무선통신사업을 하는 (주)지아이씨의 자금담당 차장이었는데 "사장님이 미국에 출장을 갔다"며 "상반기중 미국 제3시장 등록이 잘 추진될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이 지점은 작년 12월 (주)지아이씨에 10억원을 대출해 줬다.

이 대출에는 ''출자전환옵션''이 붙어 있었다.

이 과장은 "대출후 6개월만 지나면 대출금을 주식으로 바꿀 수 있는 권리가 생긴다"며 "기업공개가 이뤄지면 출자전환을 해 자본이득을 노릴 수 있다"고 말했다.

은행들은 각종 대출 틈새상품도 쏟아내고 있다.

주택은행은 개원하는 치과의사들을 타깃으로 1억5천만원까지 무보증 신용대출을 해 준다.

작년부터 판매해 이미 대출실적이 3백억원을 넘어섰다.

관계자는 "대학을 갓 졸업한 치과의사들이 주 공략대상"이라며 "건물 임대와 기계 도입에 평균 2억원 정도 소요된다는 점을 감안해 상품을 구성했다"고 설명했다.

011,017 이동전화 가입자를 대상으로 마이너스 대출을 해 주고 있는 서울은행도 "고객들의 반응이 좋아 올 초부터는 대출한도를 3백만원에서 5백만원으로 올렸다"고 밝혔다.

하나은행은 아파트 단지의 소액 대출수요를 집중적으로 파고들기 시작했다.

올림픽선수촌 아파트 단지에 있는 지점의 건의를 받아들여 이달부터 아파트관리비를 자동이체하면 1백만원 한도의 마이너스통장을 만들어 주고 있다.

주택은행 여신팀 오현철 차장은 "은행과 2금융권 간에 대출시장의 장벽은 무의미해지고 있다"며 "각 금융기관의 차별화된 상품 개발 능력이 조직의 성패를 좌우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박민하 기자 hahah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