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익(朴翊,1332~1398)은 고려말의 문신이다.

고려왕조에서 예부시랑 중서랑 세자사(世子師)등의 벼슬을 지냈다.

또 왜구와 여진을 토벌해 전공을 세우기도 했다.

조선이 개국하자 고향인 밀양에 은거하면서 이성계가 공조,형조,예조,이조 판서와 좌의정에 임명했으나 거절해 ''고려8은(八隱)''으로 불렸다.

"한겨울 낙엽진 나무가 온 산에 가득해도/눈 속에 비슷비슷하니 그 모습 분별 못하겠네/....높은 산 위에 우뚝 선 한 그루 소나무"

그가 문집인 ''송은집''에 남긴 시에서 이렇게 소나무를 노래한 것이나 집 뒷산을 송악(松岳),마을을 송계(松溪),집을 송암(松庵),호를 송은(松隱)이라 불렀던 것도 고려의 수도 송경(松京)을 잊지말자는 뜻이었다니 나라는 바뀌었어도 그는 고려인이었다.

경남 밀양시 청도면 고법리 밀양박씨 세장묘중 박익의 석실묘에서 벽화가 발견돼 문화재청이 사적지정을 서두르고 있다는 소식이다.

어디론가 가고 있는 성장한 여인들과 남자의 모습이 생동감 있게 그려져 있고 색채도 거의 완벽하게 보존된 고려말 양식의 인물풍속도라고 한다.

우리 벽화고분은 고구려지역에서만 60여기가 발견됐다.

안악고분,덕흥리고분,무용총,강서고분 등은 인물풍속벽화로 널리 알려져 있다.

백제시대의 것으로는 공주 송산리6호분과 부여 능산리 벽화고분이 있고 신라나 가야의 것으로는 고아동고분,순흥 어숙묘,순흥 읍내리고분이 있으나 인물풍속벽화랄 수는 없고 겨우 윤곽만 드러날 정도로 상태가 좋지않다.

지금까지 발견된 고려시대의 벽화고분은 북한의 개풍수락암동1호분,장단의 법당방석실분,공민왕릉인 현릉이 있고 남한에는 거창둔마리고분,안동서삼동고분,철원문내리고분이 있을 뿐이다.

별자리나 연꽃무늬 사신도를 그린것이 대부분이고 남한 벽화는 상태가 나쁜 것이 흠이다.

묘제연구는 물론 회화사 복식사 풍속사 연구에도 벽화고분 처럼 절대적 자료는 없다.

박익의 석실묘 벽화는 태풍 사오마이가 봉분을 날려버리지 않았더라면 영원히 묻혀 버렸을 희귀자료다.

보존해 갈 문화재청의 의무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