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백여년 전인 1896년이다.
지금의 청와대격인 궁내부와 각 아문(행정부처)을 연결했다.
한국 최초의 "행정전화"였던 셈이다.
이는 1876년 미국의 벨이 전화를 발명한지 20년이 지난후였다.
전화에 앞서 1885년 9월에는 당시 한성과 인천을 잇는 전신이 처음
개통되기도 했다.
이때 전화는 영어 "텔레폰(telephone)"을 음역해 "다리풍" "덕률풍"
"득률풍"으로, 또는 "어화통" "전어통" 등으로 불렸다.
고종황제가 전화로 교시를 내릴때면 신하들은 왕을 알현할 때처럼 바닥에
엎드린 채 전화를 받았다고 한다.
이 행정전화가 백범 김구 선생을 살린 일화도 전해진다.
1896년 10월 당시 평민이던 김구 선생은 민비 시해범으로 지목되던 일본군인
을 살해한 죄로 사형선고를 받고 인천감옥에 수감돼 있었다.
고종은 사형집행 직전 궁중에서 전화로 인천감리에 백범 선생의 감형을
지시함으로써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고 백범일지는 쓰고 있다.
전화는 20세기초 일제의 침탈이 심화되는 속에서도 계속 통신발전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 갔다.
1902년 3월 시외전화가 서울~인천간에 처음으로 개통돼 공중전화서비스
시대를 열었다.
같은 해 6월에는 시내전화(서울) 서비스도 시작됐다.
당시 가입자는 겨우 2명뿐이었다.
국제전화는 1924년 서울~만주 봉천간에 처음으로 개통됐다.
그러나 교환원을 거치지 않는 직통국제전화는 미군정때인 1945년에야
한국~미국간 통화가 가능해졌다.
광복이후 50년대까지는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통신 역시 암흑기를 거쳐야
했다.
정치.사회적 혼란에다 6.25전쟁으로 모든 것은 잿더미로 변했다.
6.25를 거치면서 통신시설은 대구.부산지역을 제외하고 80%가 무용지물이
됐다.
전후 우선적인 복구가 이뤄지기는 했으나 57년말에 이르러서야 통신시설은
전쟁이전 수준으로 회복될 수 있었다.
일반전화 가입자수가 59년에 7만1천여명으로 광복일인 45년 8월15일
6만9천여명을 겨우 넘어선 것이 이같은 사정을 잘 설명한다.
60년대와 70년대를 지나면서 통신부문은 급속한 확장이 이뤄진다.
전화보급률은 59년 인구 1백명당 0.30대에서 69년 1.41대, 79년에는
6.11대로 크게 늘었다.
가입자수도 71년에 50만명을 넘었고 75년과 79년에는 각각 1백만명과
2백만명을 돌파했다.
성장기반이 다져지면서 통신기술도 발전해 71년에는 장거리시외자동전화가
서울~부산간에 처음 개통됐다.
80년대는 무선통신이 괄목할만한 성장을 보인 시기였다.
한국통신이 81년 출범한데 이어 82년 지금의 데이콤인 한국데이터통신이
설립되면서 본격적인 데이터통신 시대가 열렸다.
같은 해 12월에는 무선호출(삐삐)서비스가 시작됐다.
84년에는 최초의 이동전화서비스(아날로그방식)가 선보이면서 국내에서도
"휴대폰 붐"을 몰고 오기 시작했다.
유선전화는 특히 86년 한국형 TDX(전전자교환기)가 처음 설치되면서
통신선진국으로의 도약을 위한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했다.
한국은 TDX의 독자개발로 교환기 생산.설계.시공.운용 기술의 자립을
이루고 폭발적인 통신수요를 자체적으로 소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된
것이다.
이를 통해 87년에는 지금과 같은 방식의 전국 전화자동화가 완성됐다.
이어 93년에는 유선전화 가입자가 2천만명을 돌파했다.
무엇보다 90년대는 이동전화의 시대였다.
97년10월 개인휴대통신(PCS) 서비스 개시를 계기로 이동전화는 통신서비스의
주역으로 올라섰다.
99년9월 셀룰러와 PCS를 합친 휴대폰 가입자는 2천1백만명을 기록, 유선전화
를 추월하기 시작했다.
더욱이 이동전화는 90년대 후반부터 수요가 폭증하고 있는 인터넷과 결합돼
길거리에서도 뉴스 교통 증권 등의 정보를 무선으로 실시간 조회할 수 있는
다기능 정보단말기로 확고한 위상을 굳히고 있다.
오는 2002년에는 휴대폰 하나로 전세계를 묶는 영상이동전화(IMT-2000)가
상용화될 예정이다.
이에 따라 이동전화는 21세기에도 인터넷이 열고 있는 디지털경제의 핵심
네트워크로 자리매김되고 있다.
< 문희수 기자 mhs@ ked.co.kr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2월 20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