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 32년(1450) 윤 정월 20일 예겸과 사마순 등 명나라 사신들이 서울을
떠나자 세종의 병세는 다시 악화된다.

그래서 안숭선의 저택으로 이어하는데 세자의 병세도 다시 악화되어 세자는
이서의 집으로 이차한다.

그러나 유성원 등이 의서를 상고하여 처방을 올린 것이 효험이 있었던지
세종은 2월 14일 몸을 추스르고 그동안 밀렸던 서무를 밤새워 재결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아직 평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렇게 무리를 하다가 결국 밤 이경
(밤 10시 전후)에 이르러 세종은 다시 쓰러진다.

이에 왕세자는 2월 15일에 승려 50인을 시어소에 모아 구병정근을 하게
하고 의정부와 육조 관원들을 회직하게 하여 내의들과 의약을 의논하게 하는
등 온갖 정성을 기울였으나 그 보람도 없이 2월 17일 세종대왕은 안국방
영응대군 저택의 동별궁에서 승하하고 만다.

유성원이 25세때의 일이었다.

이에 37세의 왕세자가 2월 22일 안국방 영응대군저의 동별궁에 차려진 빈전
문밖의 장막전에서 즉위하니 이 분이 문종(1414~52)이다.

문종은 등극 전인 2월 18일에 이미 부왕 세종의 추선공양을 위해 셋째
아우 안평대군 용의 요청에 따라 금자로 "화엄경" 80권을 사경하기로 하고
이미 모후인 소헌왕후 심씨의 상사때 부왕과 모후의 원찰로 내정해 두었던
고양 대자암을 확장 중수할 뜻을 승정원에 전하고 이를 의논하게 한다.

대자암은 원래 안평대군의 양부인 태종의 막내대군 성녕대군의 원찰로
지어진 절이었다.

그래서 규모가 작아 2간짜리 무량수전에 무량수불, 즉 아미타불 1구를 독존
으로 모셨었던 모양인데 이에 이르러 석가, 관음 2상을 추가로 조성하여
봉안할 뜻을 밝혔다.

그리고 제3일 법석과 7.7재,즉 49재및 소상전의 2차불사와 소상후 별작불사
및 대소상재를 소헌왕후 상사시의 선례대로 시행하도록 확정한다.

장차 유신들이 불사봉행을 반대하지 못하도록 선수를 친 것이다.

이에 2월 22일에는 7.7재중 초재를 대자암에서 지낸다.

즉위 후인 2월 26일에 안평대군의 권고에 따라 대자암 중창불사를 대신들
에게 의논하여 그 동의를 얻어내는데 이 자리에서 지붕을 청와로 덮자는
의견을 제시하는 사람도 있었다 한다.

그러나 이 소식을 접한 사헌부에서는 즉각 장령 김중렴이 이의 중지를
요청하는 상소를 올린다.

대자암의 중수는 물론 불상조성및 사경과 인경조차 즉각 중지하라는 것이다.

세종이 돌아가던 날 저녁에 세종후궁 10여인이 머리를 깎고 출가하여
비구니가 되었는데, 이들이 힘을 합쳐 안에서는 수 잘 놓는 궁녀들로 하여금
수불을 조성하고 밖에서는 공장을 모아 불상을 조성하게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불상 조성 불사도 즉각 중지시키라는 말이었다.

그러자 3월 1일에는 집현전에서도 부제학 정창손을 비롯한 학사들이
연명으로 불사 중지를 요청하는 상소를 올린다.

여기에 유성원도 수찬의 자격으로 당연히 참여하고 있었을 것이다.

집현전에서는 3월 3일에도 불사 중지를 요청하는 간절한 상소를 올리는데
여기서는 후궁의 출가를 허락한다면 이것이 전례가 되어 장차 후비의 출가나
왕자의 출가가 있을지 모르니 그 단초를 열어 놓아서는 안된다는 내용이
추가되고 있다.

그러나 문종은 이에 대한 의지가 확고하였으므로 이들의 요청을 받아
들이지 않고 오히여 3월 9일에는 좌참찬 정분, 병조판서 민신, 도승지
이사철을 대자암 현장으로 보내어 개창체제를 살피고오게 한다.

4월 10일에 대행대왕에게 영문예무인성명효라는 시호와 함께 세종이라는
묘호가 올려진다.

이에 대해 3월 13일 예조판서 허후와 공조판서 정인지는 대행대왕이 창업
이나 중흥한 임금이 아니니 세종이라는 묘호가 합당치 않다며 문종으로
고치자고 이견을 제시한다.

아마 교활한 정인지가 단순한 허후를 격동시켜 이런 진언을 함께 하였던
듯 하다.

문종은 정인지의 내심을 간파하고 북방을 개척 확장한 공로가 있으니
세종이란 묘호가 조금도 부당하지 않다고 한마디로 일축해서 세종의 성덕을
폄하하려는 정인지의 의도를 단호히 물리친다.

그리고 4월 6일에는 선왕이 "신빈 김씨는 영응대군의 유모나 마찬가지이니
영응대군저에서 함께 살게하도록 하라"고 명한 사실에 대해 이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대신들과 의논하는데, 이에 대해 영의정 하연은 아무
생각없이 괜찮다고 대답하지만 우의정 황보인은 신빈의 자손들이 드나들
터이므로 이는 허락할 수 없다는 의견을 제시한다.

황보인이 우려했던 대로 장차 신빈 자손들은 수양대군에게 빌붙어 영응대군
을 수양측에 가담하게 함으로써 영응으로 하여금 세종과 문종의 혈육들을
도륙하는데 일조하는 불행을 겪게 한다.

4월 6일 회암사에서 제 7재,즉 49재를 지내고 4월 10일 대자암에서
금자사경 전경법회를 크게 베푸는데, 이미 7일전에 당대의 명필들인 강희안
성임 이영서 안혜와 사경승 7인으로 하여금 붉은 종이에 금자로 다음과 같은
경전들을 사경해 놓고 있게 했었다.

"법화경" 7권, "범망경" 2권, "능엄경" 10권, "미타경" 1권, "관음경" 1권,
"기신론" 1권 등이었다.

그 서문은 도승지 이사철에게 짓도록 하였다.

그런데 4월 11일 이 전경법회에 동참하기 위해 수양대군이 여러 대군들 및
왕자군들과 함께 대자암으로 가서 예배를 하려 하는데 마당에 번개를 걸어
세워놓은 장 대가 갑자기 부러지면서 수양의 정수리를 쳐 피를 흘리며 혼절
하게 하는 변고가 일어났다.

이때 수양이 목숨을 잃었다면 이 절의 사실상 주인인 안평대군도 피살되지
않았을 것이고 문종의 아드님인 단종도 대권을 빼앗기고 시해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수양을 죽여야 한다는 신불의 경고였을 터이나 당시에 누가 이 사실을
눈치챌 수 있었겠는가.

6월 12일 대행대왕을 광주 대모산 헌릉 서쪽 영릉에 장사지내고 7월 6일에
일차 인사이동을 단행한다.

김종서를 좌찬성, 정분을 우찬성, 정인지를 좌참찬, 이사철을 이조판서,
이계전을 도승지로 하는 등의 내용이었다.

이때 유성원은 이극감과 함께 세자시강원 사경으로 발탁된다.

황보인이 세자사가 되고 박팽년은 보덕, 이석형 김예몽은 필선, 이개와
양성지는 문학이 되었다.

그런데 이날, 세종 말년에 세종의 신임을 받던 승 신미에게 선교도총섭
밀전정법 비지쌍운 우국이세 원융무애 혜각존자라는 칭호를 내리자 집현전
학사들을 중심으로한 유신들과 대간에서 들고 일어나 이의 부당성을 지적
하면서 그 환수를 강력하게 요구한다.

유성원도 이에 앞장서서 참여하는데 7월 15일 박팽년이 이 일로 죄를 입자
7월 16일 이런 상소를 올리며 함께 처벌되기를 자청한다.

"옛 사람은 말하는 일에서 말이 들어지지 않으면 곧 물러났습니다.

대체로 간하는 일을 행하고 말을 따르면 군신이 함께 그 아름다움을
얻으니 사군자가 평시에 품는 생각입니다.

만약 그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데 구차하게 벼슬에 나가게 되면 이는
한갓 임금의 허물을 드러내어 몸소 벼슬과 녹을 누리는 것이니 죄가 이보다
더 클 수 없습니다.

신은 박팽년과 더불어 사실 봉사(임금께 상주하는 글)를 함께 하였습니다.

당초 발의도 신과 팽년 2인이 주도하였고 소를 짓는 데서도 역시 2인이
그것을 하였습니다.

어제 전하께서 누가 먼저 기초하였느냐고 하문하심에 그때 팽년이 "신과
성원이 함께 하였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 죄를 논하면 터럭 끝이나 저울눈금 만큼도 차이가 없으니 신과 팽년은
죄가 같아 일률로 다스려져야 하는데 신만 홀로 벼슬에 있으니 다만 사론에
부끄러울 뿐만 아니라 사실 속으로 살펴봐도 꺼림칙함이 많습니다.

아울러 신의 벼슬도 거두어 주시기를 빕니다"

문종이 이를 윤허하지 않자 유성원은 다음날인 7월 17일에 또다시 다음과
같은 상소를 올린다.

"이달 7월 15일에 논한 일은 본래 열사람이 함께 소를 올려 천위를
범하였건만, 중사로 하여금 사람마다 각각 힐문하고 또 먼저 초고를 만든
자를 물었습니다.

대개 10인이 어찌 능히 동시에 의논할 수 있겠으며 그 중에 반드시 의논을
선창한 자가 있으리라 해서 였을 따름입니다.

신이 처음 대관이 신미의 일을 논한다는 말을 듣고, 신이 박팽년에게
이르기를, "우리들도 또한 말이 없을 수 없다" 하니, 박팽년이 말하기를
"내 뜻도 역시 그렇다" 하고 드디어 원고를 기초하여 신에게 보이면서,
"창졸간이라 말과 뜻에 고칠 곳이 많다" 하거늘, 신이 그 초고를 받아서
깎고 보태기를 실로 박팽년보다 더 많이 하였습니다.

이로 보면 처음 발의한 자도 신이요, 원고를 기초한 자도 또한 신이니,
신과 박팽년은 구별할 수 없으며 그 죄를 논한다면 신이 박팽년보다 더
지나칩니다.

신이 만약 마음으로 죄가 있음을 알면서도 벼슬과 녹봉에 연년하여 구차
하게 벼슬에 나간다면 이는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며, 정상을 감추고
사실대로 고하지 않으면 이는 임금을 속이는 것입니다.

신은 끝내 감히 자신을 속이고 임금을 속이며 근신의 반열에 있으면서 성명
에 누를 끼칠 수 없습니다.

신의 이 말은 꾸미는 거짓말도 아니며 색다른 주장으로 명예를 가까이
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실로 마음속에서 우러나온 말이니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신의 벼슬도
아울러 거두어 주십시오"

문종은 이 소청도 역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리고 신미의 칭호에 대한 논의가 일단 진정된 뒤인 9월 22일에 가서야
박팽년의 고신을 돌려주어 집현전 직제학으로 복귀시킨다.

(한국경제신문 1998년 2월 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