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남의 목장 실태를 순심하고 돌아온 김종서는 10월 9일 세종과 왕세자에게
그 실태를 이렇게 보고한다.

충청도 홍주의 흥양목장이 물과 풀이 넉넉하여 목장으로 하자가 없고
서산 도비산목장은 물과 풀이 부족하므로 폐지하였으며 태안에 지령산
대소산 이산곶목장 이외에 독진곶 신곶목장을 증설하였고, 전라도에는 함평
해제의 옹암 성포 두 곳에 목장을 설치하였으며, 압해도와 진도의 풍토가
모두 제주도와 비슷하여 목장을 만들기에 적합하고, 영암 황원곶도 목장
하기에 알맞으며, 경상도는 거제도가 목장에 적당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간 순심하면서 보고 들은 일들을 자세히 아뢰니, 이에 세자는
10월 18일에 도승지 유의손(1398~1456)을 불러 세종의 뜻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근일 판서 김종서가 말하기를 민간에 일이 많다 하니 이제 관원을 여러
도에 보내서 백성의 질고를 물으려 한다. 그러나 부민의 고소 법은 행할 수
없다. 종서가 또 말하기를 역리의 조잔함이 크게 심하다 하고 감사가 순행
하는데 역의 말이 거의 50필에 이른다 하니 이제 그 수를 정하여 10필을
넘지 않게 하려 하는데 어떠한가"

김종서가 삼남의 목장을 살펴보면서 마필의 부족 현상을 목도하고 또 각
역에 배치된 마필이 감사의 과도한 사용에 의해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는
폐해가 심각한 것을 파악하여 보고함으로써 이런 시정책이 제시되었던
것이다.

세종은 김종서만이 이런 민생의 질고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고 믿었기
에 예조판서의 중책을 맡고 있는 그를 삼남순찰사로 파견하여 그 실상을
살펴오게 하였던 것이다.

이때 안평대군은 자신이 십여년 수집하여 소장하고 있는 고금의 서화를
신숙주(1417~75)에게 내보이고 화기를 짓게 하니 정통 을축(1445) 초가을에
지었다는 비해당장화기가 바로 이것이다.

신숙주의 문집인 "보한재집" 권 14에 실려 있다.

한편 세종은 일찍이 집현전 부교리 김예몽(?~1469), 저작랑 유성원(?~1456)
등에게 명하여 의서를 모아서 부문별로 나누어 한 책으로 만들고 안평대군
등으로 하여금 이를 감수하게 하여 "의방류취"란 책으로 편찬해 내게 하니
총 3백65권이었다.

이 책이 10월 28일 3년만에 완성을 보았다.

김종서가 예조의 장관으로 이 책의 편찬에 음양으로 간여하였을 것은 당연
하다.

또 11월 21일에는 춘추관에 보관되어 있던 "태조실록" 15권과 "공정왕실록",
즉 "정종실록" 6권, "태종실록" 36권을 각각 3벌씩 더 베껴내어 본관 실록각
과 충주 전주 성주의 사고에 분장하는 일을 해내는데 이 역시 예조판서인
김종서의 지휘 아래 이루어진 일이었다.

세종 28년(1446)은 김종서가 64세, 세종이 50세 되는 해이다.

이해 1월 5일에 김종서와 뜻을 같이 하며 세종을 오래 함께 보필해 왔던
좌의정 신개(1374~1446)가 73세의 고령으로 세상을 하직한다.

이 장례 역시 예조판서 김종서가 주선하여 예장으로 치러주게 되었다.

그리고 1월 15일에는 김종서가 세종 26년(1444) 7월 4일 세자에게 소금과
물고기 쇠의 이익이 막대함을 들어 이를 국가에서 관장하여 판매할 것을
건의함으로써 소금의 제조와 전매를 담당할 의염색이 설치되어 각도에
제렴소를 설치하고 시험제조 판매한 결과를 보고받게 되는데 각도에서
상당한 성과를 올리고 있다.

이날 김종서는 또 예조의 의견으로 박학굉사과와 제과의양과로 중시를
치러 유생들이 등과한 뒤로 공부하지 않는 병폐를 바로잡자고 계청한다.

그런데 1월 21일에는 뜻밖의 일로 김종서가 사헌부로부터 지탄을 받게 된다.

사도시 령 박충지의 고신에 사헌부가 50일동안 서경하지 않아서 세종이
지평 박자오를 불러 그 사유를 물으니, 박충지가 세력을 믿고 위에 청탁
하여 오래 재임해야 하는 구임직인 내자시 판관(종5품)에 임명되었으나
조금후에 사도시 령으로 옮겨가고 다시 몇달되지 않아 호조 정랑(정5품)으로
옮겨 갔으므로 서경을 하지 않았다고 고한다.

그 세력 있는 이라는 것은 김종서를 지목한 말이었다.

박충지가 김종서의 인척이 되기 때문이었다.

김종서가 인정에 끌리어 그런 청탁을 들어주었을 지도 모르겠으나 세종은
김종서가 연루된 줄 알자 그랬으면 진작에 서경할 수 없는 사연을 아뢸
것이지 어째서 50일 만기를 채웠느냐고 사헌부 대간들을 꾸짖어 이를 무마해
버린다.

그리고 이틀 뒤인 1월 24일에 김종서를 의정부 우찬성(종1품)겸 판예조사
로 승진 발령한다.

예조판서 자리를 6년동안 맡겼었던 것인데 이제 우찬성으로 승진시키면서도
예조의 일을 계속 관장하도록 판예조사를 겸직하게 하였던 것이다.

이날 예조판서로는 형조판서를 지냈었던 정흠지(1378~1439)의 장자인
정갑손(?~1451)을 임명하였다.

그런데 정갑손은 불과 3개월 뒤인 4월 25일에 예조판서 자리를 정인지에게
내놓고 물러난다.

세종은 김종서가 의정부에 들어오자 바로 1월 26일 그만을 불러들여 봉화
제도라는 것이 사변에 대응하고자 하여 설치한 것인데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니 폐지하든지 보완하든지 양단간에 결단을 내려야 하겠다며 그 의견을
묻는다.

이에 대해 김종서는 다음과 같이 그 의견을 개진한다.

"지금 봉화간(봉화를 맡아 지키는 사람)은 매처에 다만 잔망한 1,2인만
있을 뿐이며, 또 봉화로써 수령들의 공과를 삼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쇠퇴해
졌습니다. 만약 매처마다 각기 6명으로 정하여 3번으로 나누어 지키게 하고,
감고로 택정하여 겸하여 수령에게 책임지운다면 거의 될 것입니다"

2월 3일에 의염색에서 소금제조 판매법을 조속히 시행할 수 있게 해달라는
계청이 있게 되자 2월 8일에 김종서 등은 의정부에서 다음과 같이 의논하여
아뢴다.

"이 앞에서는 의염색에서 파는 소금, 즉 의염 닷말을 쌀 한말로 기준하여
팔았었는데 지금 싯가는 소금 두말을 쌀 한말로 친다 합니다. 처음에 의염을
군자감에 맡긴 것은 의창을 도와 가난한 백성을 구제하고자 해서 였습니다.
하물며 염호(소금 굽는 백성)가 고생해서 구워냄에서 이겠습니까. 지나치게
헐값으로 매매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지금부터는 매달 싯가에 기준하여
한말씩만 더 주어 팔게 해주시기를 빕니다"

세종은 이런 청을 흔쾌히 받아들인다.

그런데 세종 부부가 3월 9일 수양대군의 저택으로 이어한 다음날인 3월
10일에 왕비 청송 심씨가 병이 난다.

친정 어머니와 젊은 두 아드님을 연거푸 잃은 마음의 상처가 곪아서 터져
나온 병환인 듯 백약이 무효하고 의술이 듣지 않는다.

그래서 세종은 산천의 신불에게 중사를 보내어 기도하고 죄수들에게
사면령을 내려 음덕을 쌓는 등 신불의 가호에 의지하려 한다.

드디어 14일에는 우의정 하연을 종묘에 보내고 우찬성 김종서를 사직단에
보내어 기도하게 한다.

그래도 병환의 차도가 없고 점점 위중해지자 15일에는 승려 80여명을
시어소인 수양대군저로 불러다가 철야정근을 시키는데 이 자리에서 왕세자를
비롯한 제대군들 및 내시들이 연비(팔뚝에 불침을 놓는 것)참회로 병고를
대신하려는 의식을 치르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기도의 효험도 없이 왕비 청송 심씨는 3월 24일에
수양대군저에서 52세로 훙서하고 만다.

이에 3월 25일에 국장도감과 산릉도감이 설치되어 왕비의 장례를 맡아
치르게 되는데 이때 김종서는 국장도감의 제조가 되어 실제로 국장 치르는
일을 주도하게 된다.

이때 세종은 인생무상을 더욱 절감하고 불교에 깊이 귀의해가니 우선
대행왕비(시호를 올리기 전에 돌아간 왕비를 일컫는 말)를 위해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으로 하여금 금글씨(금자), 은글씨(은자)로 불경을 베껴 써내는
사경불사를 진행케 하는데 이 사경 공덕으로 대행왕비가 왕생극락하기를
기원하기 위해서였다.

이런 불사를 실행하면 필연 대간을 비롯한 유신들의 반대가 성가실터이라
세종은 우선 승정원에 이 뜻을 전하고 의정부와 의논해서 이를 원만하게
주도해 나갈 인물을 천거하라 한다.

의정부에는 김종서와 같은 믿음직스런 신하가 있으니 반드시 잘 처리해낼
줄 알았기 때문에 이런 명령을 내린 것이다.

이 내용이 알려지자 예측했던 대로 사헌부 사간원 집현전 성균관에서 이의
부당성을 지적하며 중지를 요청하는 상소가 빗발치듯 올라온다.

그러나 세종은 이를 일축하고 사경불사를 계속 강행해 나간다.

김종서를 비롯한 의정부 대신들의 보이지 않는 협찬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는 소헌왕후 심씨의 상을 삼년상으로 치르기로 하여 이를 제도화한다.

이 역시 김종서가 영의정 황희와 우의정 하연등을 설득하여 주청함으로써
관철시킨 일이었다.

세종은 모후인 원경왕후 여흥 민씨 상에 아버지가 있을 때의 모친상은
1년이라는 "주문공 가례"의 예문에 따라 1년상을 입었었는데 이를 늘 미안
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터라 이참에 의례를 상정하면서 이를 법제화 하려하니
김종서 등이 다음과 같이 아뢰어 이를 적극 찬동하였던 것이다.

"삼년상은 천하의 통상이니 천자로부터 서인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습니다.
공자 맹자께서 가르치시어 만세에 법으로 남기셨으므로 어머니를 위해
삼년상을 입는 것은 인정과 예의에 심히 합당하다고 하겠습니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3월 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