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정하였다.
이희승은 맞춤법 표준어 고유어등을 연구하여 우리말과 글의 정리및
보급에 공헌하였고 국어사랑 나라사랑 정신을 몸소 실천한 분이다.
일석은 1896년6월9일 경기도 광주군 의곡면 포일리(현 의왕시 포일동)
에서 이종식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다섯살때 어머니로부터 천자문과 동몽선습등을 배우다가 시골
서당에서 사서삼경을 익혔다 한다.
1908년 이정옥과 결혼한 후 상경,관립한성외국어학교 영어부에 입학하여
동기생 신익희 정구영 윤홍섭등과 교우하였으나 1910년 한.일합병으로
학교가 문을 닫게되자 2학기를 마치지 못한채 그해 10월에 졸업하게
된다.
그는 낙향하는 부친을 따라 고향으로 내려갔으나 공부를 계속하겠다는
일념으로 다시 상경하여 "갖은 풍파를 겪으면서 중동학교를 거쳐
중앙학교를 졸업한 것이 3.1운동 전해인 1918년3월이었다"고 회고하였다.
그가 국어학을 연구하여야겠다고 결심한것이 바로 중학시절이었다.
그는 주시경에게 직접 배우지는 못했으나 "국어문법" "말의 소리"등
저서를 읽으면서 생애의 방향을 굳혔다는 것이다.
이희승은 1925년 경성제국대학 예과에 입학하여 1930년 봄에 본과
조선어문학과를 졸업하였다.
이 학력이 "이희승논란"의 근거가 되지않았나 싶다.
일석이 "10월의 문화인물"로 선정되자 김영환등 "바로모임"회원들은
그가 정부의 한글만쓰기운동에 배치되는 국한문혼용논자이었고 그것이
그의 "식민언어학적학풍"에서 비롯된것이라고 비판을 했었다.
그러나 이희승은 1942년 이화여전교수로 재직중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일경에게 체포되어 함남 홍원경찰서와 함흥형무소에서 3년간 옥고를
치루다가 8.15해방으로 출옥하게 된것이다.
그는 이해 12월에 경성대학 법문학부교수로 재출발하여 우리말과 글의
연구와 교육에 진력하다가 1989년11월27일 94세를 일기로 생애를 마쳤다.
일석은 단구였다. 6.25나던 해에 재어본 자신의 키가 142.6cm, 몸무게는
43.6kg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별명이 "대추씨"였다고 한다. "작다"는 뜻도 있지만 "단단하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는 셈이다.
일석이란 호도 그는 "돌이란 변통성이 없지만 깨뜨려도 그 굳음을
빼앗을수 없다"고 풀이하였었다. 그는 돌처럼 살다가 돌처럼 갔다고
할수 있을지 모른다.
(한국경제신문 1994년 10월 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