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일자 천자칼럼에서 태권도에 대하여 잘못 인식하고 있는 몇가지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우리 민족의 국기인 태권도의 역사가 국방을 위한 무예로 시작되어
사회정세에 따라 민속경기가 되는등 민족무예와 민속경기 사이를 반복
왕래하면서 발전되어 온 것"이라고 민족무예와 민속경기를 분리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격투술은 무술적 요소와 경기적 요소를 함께 포괄하고 있어
이것이 상황에 따라 인명을 살상하기도 하고 상대방의 위해를 줄이는
규칙아래 기량을 겨루는 경기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후한서에 AD136년 부여왕이 경사에 내조했을때 순제가 황문으로 하여금
북치고 피리불고 각저희를 하게 했다는 기록도 있으며,고려 충혜왕때는
왕이 직접 수박희를 했다는 기록이 있다. 희란 놀이,즉 경기라고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칼럼에서 가장 위험한 내용은 "일제가 식민정책으로 태껸을 탄압,
가라테와 비슷하다고 태껸을 가라테라 부르게 하고 가라테형을 보급하여
태껸의 말살을 꾀하였다"는 대목이다. 오키나와에서 가라테가 도쿄에
처음 상륙한 것이 1922년이다.

그러나 인간문화재 고송덕기옹은 1920년께에 태껸을 아주 못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물론 일본 순사들이 이를 금지 했기 때문이다.

1924년에 게이오대학 당수부를 만들고 1934년에 가라테의 본산인
쇼요토칸을 창립한 가라테가 무슨 수로 이미 1920년께에 자취를 감춘
태껸에 영향을 끼칠수 있었을까. 따라서 태껸을 가라테라 불렀던 일은
애초에 있을 턱이 없는 것이다.

또 하나 우스운것은 "의식있는 태껸사범이 비밀리에 전승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즉 태껸이 비전되어 태권도로 대성을 하였다는 뜻이다.

그런데 사범이라는 용어는 일본사람들의 조어로 태껸사범이란 원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의 태권도를 만든 최초의 장본인들은 모두 일본
유학생들이었다.

그 반면에 태껸기능을 가진 사람은 태껸인간문화재 송덕기옹 한사람을
빼고는 아무도 생존자가 없었다.

태권도가 올림픽 종목으로 채택된 것은 유사이래 우리 민족의 세계적
위업이라는데 이의가 없다.

이 기회에 우리는 냉정하게 태권도를 분석하고 새로운 가치관을 정립하고
올바른 역사와 전통을 정리해야 한다는데 관심을 둘 필요가 있다.

태권도가 올림픽 종목으로 채택되자마자 모든 언론매체가 일제히 태권도
기사를 쏟아 내어 홍수를 이루는 가운데 그동안 상식화된 태권도에 대한
그릇된 정보 역시 범람하고 있다.

사회를 계도해야하는 것을 사명으로 하는 언론이 아무런 비판의식없이
논리적모순이 현저한 내용을 그대로 인용하는 것은 향후 태권도의 발전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않을 것이다.

이 용 복 <사단법인 대한택견협회 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