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화석연료 발전소에 적용되던 탄소 배출 규제를 없앤다. 인공지능(AI) 시대에 필요한 전력을 확보하려면 석탄과 천연가스를 더 태워야 한다는 논리다. 트럼프 대통령의 ‘기후 규제 해체’가 더욱 속도를 내고 있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와이오밍주 데이브 존슨 화력발전소 AP연합뉴스
와이오밍주 데이브 존슨 화력발전소 AP연합뉴스

◇AI 전력난이 푼 빗장

미국 환경보호청(EPA)은 14일(현지시간) 미국 전역 발전소에 적용되던 탄소 배출 규제를 폐지하겠다고 발표했다. 휴스턴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에너지회의에 참석한 리 젤딘 EPA 청장은 “미국 전력 부문에서 역사상 최대 규모의 규제 완화”라고 자평했다.

핵심은 전임 조 바이든 정부의 환경 규제를 없애는 것이다. 바이든 행정부는 2024년 기존 석탄발전소와 신규 천연가스 발전소에 탄소 포집·저장(CCS) 설비 도입을 의무화하는 규정을 마련했다. 기준을 충족하지 못한 발전소는 폐쇄하고 신규 발전소는 최대 출력으로 가동하지 못하도록 제한했다. 이에 전력업계는 “달성하기 어려운 기준”이라며 반발했다.

AI 데이터센터 확산으로 미국 전력 수요가 급증하는 가운데 이번 규제 폐지로 신규 발전소 건설이 촉진될 것으로 전망된다. 탄소 감축 관련 가동 제약이 사라지며 신규 천연가스 발전소 사업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국제신용평가사 무디스는 미국 데이터센터 전력 수요를 충당하려면 2030년까지 1100억달러를 들여 45기가와트(GW) 규모 발전 설비를 새로 지어야 하며 이 중 3분의 2 이상은 천연가스 발전이 담당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환경 규정을 충족하지 못한 기존 석탄발전소의 조기 폐쇄 가능성도 낮아졌다. 트럼프 대통령은 최근 데이터센터에 필요한 전력을 확보한다는 명분으로 폐쇄 예정인 노후 석탄발전소에 계속 가동을 명령하는 등 전례 없는 조치를 취하고 있다. 화석연료 의존도를 높여야 에너지 가격을 낮출 수 있다는 생각에 따른 것이다.

EPA 당국자들은 이날 한발 더 나아가 “발전소의 온실가스 배출이 중대한 대기오염원”이라는 기존 연방정부 판단까지 폐기하겠다고 제안했다. 이 판단은 발전소에 환경 규제를 적용하는 제도적 근거다. 폐기가 이뤄지면 향후 민주당으로 정권이 교체되더라도 발전소 탄소 배출량을 규제하기 어려워진다.

◇31개 환경 규제 겨눈 EPA

EPA는 원래 환경 보호를 담당하는 연방기관이지만 지난해부터 트럼프 행정부 기조에 발맞춰 환경 규제를 철폐하는 쪽으로 움직였다. 젤딘 청장은 지난해 3월 미국 전 산업군에 걸친 31개 환경 규제를 모두 없애버리겠다고 선포했다. “기후변화라는 종교의 심장부에 비수를 꽂겠다”는 포부에서다.

1년 반이 지난 지금 그의 다짐은 속속 현실화하고 있다. 규제를 완화하는 수준이 아니라 법적 근거를 뿌리째 없애버리는 식이다. 지난 2월엔 “온실가스는 공중보건에 대한 위협”이라고 규정한 버락 오바마 행정부 시절의 ‘위해성 판정’을 철회했다. 온실가스를 규제하기 위한 법적 토대가 사라지며 관련 규제 전반의 법적 정당성도 약해졌다.

반발은 거세다. 민주당 소속 주정부와 환경단체들은 위해성 판정 철회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이번 발전소 규정 변경에 대해서도 별도 소송이 제기될 것으로 전망된다. 과거 EPA 법률고문실에서 근무한 변호사 앨릭스 본드는 “결국 이 사안은 연방대법원으로 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美 압박에…글로벌 기후자금 이탈

트럼프 대통령의 반(反)기후정책 드라이브는 미국 밖으로 확산하고 있다. 한동안 각국 정부의 화두이던 ‘기후금융’이 대표적이다. 최근 블룸버그는 미주개발은행(IDB)과 아시아개발은행(ADB) 등이 기후금융 목표 폐기를 논의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기후금융이란 온실가스 감축과 기후변화 적응을 위해 자금을 투자·지원하는 것을 뜻한다.

세계은행은 6월 전체 금융 지원의 45%를 기후변화 대응 분야에 배정한다는 목표를 폐기하겠다고 했다. 블룸버그가 인용한 소식통에 따르면 미국은 화석연료 사업에 대한 금융 지원 제한도 완화하라고 요구한 것으로 전해졌다.

미국의 정치적 압박이 커지자 기후자금 지원을 주도한 유럽도 위축되고 있다. 영국은 기후금융 지원 규모를 종전 ‘5년간 116억파운드’에서 ‘3년간 60억파운드’로 하향 조정했다. 독일도 연간 60억유로를 지원한다는 목표를 올해 달성하기 어려울 것으로 예상된다.

김미리 기자 mirimir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