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왼쪽)가 지난 15일 일본 도쿄에서 열린 전몰자 추도식에서 연설하기에 앞서 나루히토 일왕(가운데)과 마사코 왕비(오른쪽) 앞을 지나가고 있다. 사진=EPA연합뉴스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왼쪽)가 지난 15일 일본 도쿄에서 열린 전몰자 추도식에서 연설하기에 앞서 나루히토 일왕(가운데)과 마사코 왕비(오른쪽) 앞을 지나가고 있다. 사진=EPA연합뉴스
일본 다카이치 사나에 정권과 자민당이 전쟁 책임에 대한 ‘반성’ 표현을 사실상 지우고 있는 것과 대조적으로 나루히토 일왕은 과거사를 직시하고 기억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거듭 강조하고 있어 관심을 모은다. 일본 정치권과 왕실의 역사 인식 차이가 한층 선명해지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나루히토 일왕은 지난 15일 도쿄 일본무도관에서 열린 전국전몰자추도식에서 “과거를 돌아보고 깊은 반성 위에 서서” 전쟁의 참화가 다시 반복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밝혔다.

반면 같은 행사에서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는 ‘반성’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다. 다카이치 총리는 약 310만명의 일본인 전몰자를 추도하면서 “전쟁의 참화를 두 번 다시 반복하지 않겠다”고 강조했지만 일본이 전쟁 과정에서 아시아 국가들에 끼친 피해나 가해 책임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집권 자민당의 메시지도 비슷하다. 자민당은 올해 종전기념일 성명에서 전쟁 희생자에 대한 애도와 전후 일본이 ‘평화국가의 길’을 걸어왔다는 점을 강조했다. 하지만 과거 전쟁에 대한 ‘반성’이나 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가해 책임은 담지 않았다.

이와 대조적으로 나루히토 일왕은 최근 들어 과거사를 기억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더욱 분명히 내놓고 있다. 지난 6월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방문했을 때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옛 일본군에 의해 억류됐던 네덜란드인 관련 단체 관계자들과 만났다.

당시 그는 기자들과 만나 “과거의 역사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며 “과거의 역사를 직시하고 과거의 역사에서 겸허하게 배우는 자세가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아사히신문은 이를 나루히토 일왕이 선대인 아키히토 상왕으로부터 이어받은 역사관에 기반한 발언으로 평가했다.

아키히토 상왕은 황태자 시절부터 6월23일 오키나와 위령의 날, 8월6일 히로시마 원폭 투하일, 8월9일 나가사키 원폭 투하일, 8월15일 종전일을 “어떻게 해서든 기억해야 하는 날”로 꼽아왔다. 재위 기간에는 미치코 상왕후와 함께 국내외 전쟁 피해 지역을 찾아 희생자를 추모했고, 전후 70년이었던 2015년 전국전몰자추도식에서는 처음으로 ‘깊은 반성’이라는 표현을 공식 메시지에 넣었다.

반면 일본 총리의 전몰자추도식 연설에서는 ‘반성’이라는 표현이 장기간 사라져왔다. 지난해 이시바 시게루 당시 총리가 “그 전쟁에 대한 반성과 교훈을 다시 깊이 가슴에 새겨야 한다”고 언급했지만, 다카이치 총리는 올해 다시 이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다.

다카이치 총리와 자민당이 안보 강화와 보수적 역사관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왕실의 ‘기억과 반성’ 메시지가 상대적으로 더 부각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정치가 과거의 전쟁을 일본인의 희생과 전후 평화에 초점을 맞춰 설명하는 반면, 왕실은 전쟁의 가해와 피해를 포함한 과거 자체를 잊지 말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이어가고 있는 셈이다.

도쿄=최만수 특파원 bebo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