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석문 프레스토 리서치센터장. 사진=프레스토 리서치
정석문 프레스토 리서치센터장. 사진=프레스토 리서치
우리는 신용카드로 커피를 살 때 어느 결제망이 정산하는지 묻지 않는다. 모바일 앱으로 해외 송금할 때 서버 구조를 고르지도 않는다. 좋은 기술은 대개 화면 뒤에 숨어 있다. 사용자는 기술의 이름이 아니라 더 빠르고, 싸고, 안전한 결과를 경험할 뿐이다.

블록체인은 아직 그렇지 못하다. 디지털자산을 직접 사용하려면 지갑을 개설하고, 복구 문구를 보관하고, 네트워크와 수수료용 토큰을 확인해야 한다. 체인이 달라지면 자산을 옮기는 절차도 필요하다. 업계에는 익숙한 과정이지만 일반 소비자에게는 서비스가 떠넘긴 학습 비용이 존재한다.

최근 금융기관과 플랫폼이 주목하는 ‘보이지 않는 블록체인’은 이 같은 비용을 화면 뒤로 보내려는 시도다. 하나의 잔액만 보여주고, 시스템이 적절한 네트워크와 결제 경로를 고르며, 수수료도 서비스가 대신 처리한다. 이메일이나 생체인증으로 계정을 만들고, 접근 권한을 잃었을 때 복구하는 기능도 시험하고 있다. 다만 편리한 지갑이 곧 대중화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필자는 블록체인의 일상 도입을 가르는 기준이 기술의 완성도보다 소비자가 체감하는 효용에 있다고 본다. 소비자가 기존 방식보다 획기적으로 편리하거나 유리하다고 느끼지 못한다면, 블록체인을 보이지 않게 만든다고 해도 선택할 이유가 없다. 스타트업 업계에서 흔히 말하는 ‘10배의 개선(10x improvement)’이 필요한 이유다. 달리 말하면, 2~3배 정도의 개선만으로는 기존의 관성을 깨고 사용자 행동의 변화를 이끌어내기 충분하지 않다는 뜻이다.

한국금융연구원의 최근 분석은 이 간극을 잘 보여준다. 국내 가맹점의 90%가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받아들인다고 가정해도 별도 혜택이 없다면 예상 사용률은 4.4%에 그쳤다. 신용카드는 이미 높은 가맹점 수용률에 더해 할인, 할부, 분쟁 처리 체계까지 갖추고 있다. 사업자의 정산 비용이 낮아진다는 이유만으로 소비자가 결제 수단을 바꾸지는 않는다는 의미다.

그래서 초기 효용은 국내 소매결제보다 기존 금융의 마찰이 큰 영역에서 먼저 나타날 가능성이 높다. 마찰이 큰 만큼 이를 해소했을 때 사용자가 체감하는 혜택도 훨씬 크기 때문이다. 국경 간 송금과 기업 정산, 소액 콘텐츠 결제, 기계 간(M2M) 거래가 대표적이다. 비자는 올해 3월 기준 스테이블코인 정산의 연환산 처리 규모가 약 70억달러라고 밝혔다. 동시에 기존 시스템을 전면 교체하기보다 모듈 형태로 연결하겠다고 강조했다. 검증된 수요를 바탕으로 변화를 추진하되, 전체 결제시장을 대체하기보다 현실을 고려한 단계적 개선을 택한 것이다.

기계 간 결제는 이러한 가능성을 더욱 선명하게 보여준다. 여러 중개기관에 의존하는 현재의 결제망에서는 센서가 데이터 한 건을 사고, 자동차가 충전한 전력만큼 즉시 지급하거나, AI가 API를 한 번 호출할 때마다 몇 원씩 내는 거래를 처리하기 어렵다. 높은 고정 비용으로 인해 소액 거래에서는 결제 수수료와 정산 비용이 구매액보다 커질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스테이블코인 기반 프로토콜은 중개 과정을 최소화해 소액 결제 비용을 획기적으로 낮출 수 있다. 업계는 이미 사용량에 따른 과금과 실시간 정산을 시험하고 있다. 그러나 이 역시 새로운 시장이 완성됐다는 의미는 아니다. 기기에 누가 어느 정도의 결제 권한을 위임할 것인지, 오작동으로 발생한 결제는 어떻게 취소하고 그 책임을 누구에게 물을 것인지 등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여기서 신원 기술의 역할이 커진다. 분산신원증명(DID)에 영지식증명을 결합하면 생년월일 전체를 공개하지 않고도 성인 여부만 확인하는 식의 선택적 증명이 가능하다. 한국의 모바일 신분증은 디지털 자격증명이 일상 서비스에 적용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데이터 주권은 단순히 개인정보를 블록체인에 올리는 것만으로 확보되지 않는다. 원본 데이터는 안전하게 분리하고, 이용자가 공개 범위를 통제하며, 분실과 탈취에 대응할 제도까지 갖춰야 한다.

로열티와 콘텐츠, 브랜드 IP 영역도 마찬가지다. 토큰화된 멤버십은 여러 플랫폼에서 보상을 사용할 수 있게 하고, 창작자의 수익 배분을 자동화하며, 실물 상품과 디지털 인증을 연결하는 피지털(physical과 digital의 합성어) 경험을 제공할 수 있다. 대체불가능토큰(NFT)에서 출발한 펏지펭귄이 실물 완구와 대형 유통망, 게임을 잇는 방식으로 IP 확장을 시도한 사례는 이런 가능성을 보여준다. K팝을 비롯한 한류 콘텐츠도 음반과 콘서트 티켓, 한정판 굿즈의 구매 이력을 글로벌 팬 멤버십과 연결할 수 있어 피지털 모델과의 결합 가능성이 큰 분야다.

또한 실패 사례도 되짚어봐야 한다. 일부 크리에이터 코인과 NFT 기반 팬덤 실험은 콘텐츠의 가치보다 토큰 가격과 단기 보상에 관심이 쏠리면서 이용자를 붙잡지 못했다. 플랫폼 간 포인트 연동 역시 기술만으로 실현되는 것은 아니다. 기업이 자사 고객을 다른 플랫폼과 연결하고 포인트 정산 비용을 분담하고 이용 데이터를 공유하려면, 그에 상응하는 분명한 사업적 유인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이해관계가 맞아 생태계와 커뮤니티가 형성될 때 비로소 블록체인 기술이 설 자리가 생긴다. 여러 플랫폼에서 사용할 수 있는 포인트와 보상은 소비자에게는 자산이지만, 발행사에는 회계·규제·부채 관리의 부담이 될 수 있는 만큼 이를 상회하는 편익이 필요하다.

결국 보이지 않는 블록체인이 현실 세계에서 작동하려면 최소한 세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첫째, 소비자가 체감하는 편익, 둘째, 사고가 발생했을 때 책임지는 구조, 셋째, 기업과 플랫폼을 잇는 상호운용성이다. 이 가운데 하나라도 빠지면 ‘마찰 없는 경험’은 화면상 매끄러운 시연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

한국에는 기회와 높은 문턱이 함께 있다. 간편결제와 모바일 금융이 이미 편리하기 때문에 ‘블록체인을 쓴다’는 사실만으로는 경쟁력이 되기 어렵다. 그 대신 해외 정산, 크리에이터 수익 배분, 팬덤 멤버십, 정품 인증처럼 아직 마찰이 큰 영역에서 효용을 증명해야 한다. 콘텐츠와 브랜드 IP를 비롯해 고도화한 소비자 금융 모바일 앱까지 보유한 한국 산업의 강점도 이 지점에서 살아날 수 있다.

해시드와 블루밍비트, 한국경제신문이 공동 주최하는 글로벌 콘퍼런스 ‘이스트포인트:서울 2026’이 일상 속 블록체인을 주요 의제로 다루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은 미래의 사용 사례를 더 많이 나열하는 일이 아니라, 어떤 문제에서 기존 방식보다 실제로 10배 이상 나은 효용을 제공하는지 검증하는 일이다.

블록체인의 대중화를 판단하는 질문은 '얼마나 많은 사람이 지갑을 만들었느냐'가 아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블록체인을 의식하지 않고도 더 나은 서비스를 이용하게 됐느냐'다. 블록체인의 대중화는 사람들이 블록체인을 쓰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게 될 때 시작된다.

정석문 프레스토 리서치센터장

"외부 필진의 기고 내용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