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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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 회사원 김모씨. 매일 회사에 다니면서 맡은 업무를 처리하고 동료와의 대화에도 큰 문제가 없다. 하지만 퇴근 후 김씨의 모습은 이전과는 부쩍 달라졌다. 귀가하면 '전기 퓨즈가 나간 것'처럼 지쳐 많은 시간을 누워 지낸다. 예전처럼 즐겁거나 기대되는 일이 눈에 띄게 줄어든 데다 잠을 계속 자도 피로가 풀리지 않는 것 같다.

김씨처럼 역할이 주어진 직장에서의 일상생활 등은 유지하면서도 마음속 무기력감 등을 안고 사는 사람들이 많다. 업무에 큰 지장은 주지 않기 때문에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 있지만 이들도 우울증 환자일 가능성이 있다.

최원석 고려대 구로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14일 "일상 기능을 유지하면서도 내면에선 우울감, 무기력, 공허감, 흥미 저하 등을 계속 호소하는 상태를 '고기능 우울증'이라고 부른다"며 "이들이 진료받으면 주요 우울장애나 지속성 우울장애 등으로 진단되기도 한다"고 했다.

업무와 일상을 수행하고 있어 스스로도 증상을 인지하지 못하지만 정신 질환의 징후일 수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치료가 늦어져 병세가 악화할 위험이 높다.

고기능 우울증은 정식 진단명은 아니다. 우울 증상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사람의 모습을 이해하기 위해 의료 현장에서 활용하는 용어다.

정신건강의학과에선 '일을 할 수 있는지'만으로 우울증 여부를 판단하지 않는다. 우울감이나 흥미 저하가 얼마나 오래 지속됐는지, 수면, 식욕, 에너지, 집중력 등에 변화가 있는지 등을 종합적으로 살펴본다.

이런 증상이 다른 신체질환이나 약물 복용 탓에 생겼는지도 함께 확인한다. 주요 우울장애는 우울감이나 흥미 저하 등의 증상이 2주 넘게 이어졌다면 진단할 수 있다. 지속성 우울장애는 성인이 만성적인 우울 증상을 2년 넘게 호소할 때 진단한다.

우울증은 단순히 기분이 가라앉는 증상만 호소하지 않는다. 이전엔 즐겁게 하던 활동이지만 갑자기 흥미나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게 되는 '흥미·쾌감 저하'도 우울증의 증상 중 하나다. 쉽게 피로해지거나 집중력과 판단력이 떨어지는 것도 마찬가지다.

좀처럼 잠이 들지 못하거나 갑자기 잠이 너무 많아지는 수면 변화, 식욕과 체중의 변화, 이유 없는 초조함과 무기력감도 우울증 증상이다. 일부 환자는 슬픔보다 짜증과 예민함, 반복되는 신체 통증을 먼저 호소하기도 한다.

고기능 우울증을 환자는 다양한 어려움 속에서도 책임감이나 익숙한 생활 습관에 의지해 업무를 이어간다. 하지만 같은 일을 처리할 때도 이전보다 훨씬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실수하지 않기 위해 자신을 과도하게 몰아붙이기도 한다. 직장에선 평소와 같은 모습을 보이지만 퇴근 후가 되면 대화나 집안일조차 버겁게 느껴진다. 주말 내내 누워 있어도 회복되지 않는 양상이 반복된다.

최 교수는 "업무 성과가 유지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우울 증상이 가볍다고 단정해선 안 된다"며 "겉으로 드러나는 기능보다 그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고 있는지를 함께 살펴야 한다"고 했다.

번아웃과 우울증은 피로, 무기력, 집중력 저하 등을 호소한다는 점에서 증상이 비슷하다. 세계보건기구(WHO)는 번아웃을 질환이 아닌 만성적인 직장 스트레스와 관련된 '직업적 현상'으로 분류한다. 에너지가 고갈된 느낌, 업무에 대한 냉소나 심리적 거리감, 직업적 효능감 저하를 주로 호소한다. 이들 증상은 직장이나 특정 업무 상황을 중심으로 나타난다.

우울증은 직장을 벗어난 뒤에도 증상이 이어진다. 휴가를 가거나 충분히 쉬어도 기분이 나아지지 않고, 취미와 가족관계 등 생활 전반에서 흥미와 즐거움이 줄어들 수 있다.

스스로를 '가치 없는 사람'이라고 여기거나 과도한 죄책감을 느끼는 환자도 많다. 심하면 이런 생각 탓에 죽음이나 자해 등을 떠올린다. 우울한 감정은 일시적인 슬픔과는 다르다. 지속적이고 무겁게 다가온다. 즐거운 일이 생겨도 우울감은 쉽게 해소되지 않는다.

최 교수는 "번아웃과 우울증은 명확히 나뉘기보다 함께 나타날 수도 있다"며 "증상이 업무 영역에만 국한되는지, 쉬었을 때 회복되는지, 일상 전반의 흥미와 자기평가까지 달라졌는지를 살펴봐야 하지만 스스로 진단하는 것보다는 전문의 평가를 받는 게 좋다"고 했다.

이런 증상으로 정신건강의학과를 찾으면 우울감과 흥미 저하, 수면·식욕 변화, 피로감, 집중력 저하 등 증상의 종류, 지속 기간, 일상생활에 미치는 영향을 면담해 종합 평가한다. 갑상샘 질환이나 빈혈, 수면장애, 복용 중인 약물 등 우울 증상과 비슷한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다른 원인도 함께 살핀다.

치료는 증상 수준과 지속 기간, 개인의 건강 상태에 따라 달라진다. 상담과 인지행동치료, 항우울제 등 약물치료를 함께 활용한다. 규칙적인 수면과 운동, 식사 등 생활 습관을 관리하는 것도 회복에 도움이 된다. 다만 증상이 계속된다면 생활 습관 개선만으로 해결하기보다 전문의 진료를 받아야 한다.

최 교수는 "우울감이나 무기력, 흥미 저하가 2주 이상 지속되거나 충분히 쉬어도 회복되지 않는다면 '혼자 버티기'보다 정신건강의학과 의사의 평가를 받아보는 게 좋다"고 했다.

이지현 기자 bluesk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