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인쇄회로기판(PCB) 업체들이 인공지능(AI) 붐을 타고 기존 범용 저가 제품에서 고성능 기판으로 빠르게 전환을 시도하고 있다.  /후스전자
중국 인쇄회로기판(PCB) 업체들이 인공지능(AI) 붐을 타고 기존 범용 저가 제품에서 고성능 기판으로 빠르게 전환을 시도하고 있다. /후스전자
중국 인쇄회로기판(PCB) 업체들이 공격적으로 증설 경쟁에 나섰다. 인공지능(AI) 서버용 고급 기판 수요를 겨냥해 업체별로 수천억원대 투자 계획을 잇따라 내놓고 있다.

AI 서버 한 대에 들어가는 PCB 가치가 기존 서버보다 크게 높아지면서 발 빠르게 저가 범용 기판에서 고다층·고밀도·고속·저손실 기판으로 무게중심을 옮기는 모습이다. 일각에선 중국발 공급 과잉이 PCB 시장의 가격 하락 압력으로 번질 가능성도 우려하고 있다.

범용 저가서 '고성능' 기판으로

중국 인쇄회로기판(PCB) 업체들이 인공지능(AI) 붐을 타고 기존 범용 저가 제품에서 고성능 기판으로 빠르게 전환을 시도하고 있다.  /빅토리자이언트테크놀로지
중국 인쇄회로기판(PCB) 업체들이 인공지능(AI) 붐을 타고 기존 범용 저가 제품에서 고성능 기판으로 빠르게 전환을 시도하고 있다. /빅토리자이언트테크놀로지
9일 중국 매체를 종합해보면 올 상반기 중국 업체 20곳 이상이 공격적인 증설 계획을 발표했다. 글로벌 AI 데이터센터 투자가 폭발적으로 늘면서 서버 내부에서 전력과 신호를 연결하는 고성능 기판 수요가 빠르게 커지고 있어서다.

대표적으로 엔비디아의 공급 업체인 빅토리자이언트테크놀로지는 올 1분기 설비투자를 전년 동기 7억3010만위안에서 36억위안(약 7970억원)으로 크게 늘렸다. 후스전자도 같은 기간 설비투자를 6억5810만위안에서 15억위안으로 두 배 이상 확대했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중국 주요 업체들이 프로젝트당 수억달러를 투입하고 있다"며 "최근 수년 새 가장 강한 성장 국면으로 평가된다"고 했다.

PCB는 반도체, 메모리, 전원부, 네트워크 장치 등 전자부품을 물리적으로 고정하고 전기 신호가 오가도록 만드는 기판이다. 스마트폰, 자동차, 통신장비, 서버 등 거의 모든 전자제품에 들어간다.


최근 들어 주목받고 있는 건 AI 서버용 고급 PCB다. AI 서버는 그래픽처리장치(GPU), 중앙처리장치(CPU), 고대역폭메모리(HBM), 스위치, 전원부, 냉각 시스템이 고밀도로 배치된다. 이 부품들이 초고속으로 데이터를 주고받으려면 기판도 더 많은 층을 쌓고, 신호 손실을 줄여야 한다.

수요가 급증하고 있는 AI 서버는 PCB의 단가와 기술 난도를 동시에 끌어올리고 있다. 시장 조사 업체 프로스트앤드설리번은 전 세계 AI 서버 PCB 시장 규모가 2024년 32억달러에서 2029년 70억달러(약 10조5320억원)로 커질 것으로 예상하기도 했다. 2024~2029년 연평균 성장률은 16.5%로, 같은 기간 범용 서버 PCB 예상 성장률 4.2%를 크게 웃도는 수치다.

중국발 가격 폭락 부메랑 되나

실제 중국 업체들의 증설은 이 같은 고급 제품으로 전환에 맞춰져 있다. 선난서킷은 최근 사모 증자를 통해 최대 48억8000만위안을 조달하겠다고 했다. 조달한 자금의 대부분은 장쑤성 우시에 짓는 45억4000만위안 규모 AI 컴퓨팅 회로 프로젝트에 투입된다.

후스전자는 올 초 고밀도·고주파 PCB 중장기 수요에 대응하기 위한 33억위안 규모 프로젝트를 공개했다. 이 공장은 가동 뒤 연간 30억5000만위안의 매출을 낼 것으로 예상됐다. 중국 증권사 중신건투증권은 "컴퓨팅 파워 수요가 PCB 산업의 가장 중요한 구조적 성장 동력이 되고 있으며 제품이 고다층, 고밀도, 고속, 저손실 플랫폼으로 발전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중국 업체들은 범용 제품의 경쟁이 치열해져 마진이 크게 떨어지면서 고급 제품 전환에 매달리고 있다. AI 서버용 고다층 기판은 공급 부족과 높은 기술 장벽 탓에 단가가 높은 편이다. 중국 정부가 AI, 데이터센터, 반도체, 저궤도 위성, 전기차 등 하드테크 산업을 전략 산업으로 밀면서 고성능 전자부품 국산화 수요가 커진 영향도 있다.

여기에 미국의 대중 첨단 반도체 통제가 장기화하면서 중국 업체들은 GPU뿐 아니라 서버 부품과 기판 공급망까지 자국 내에서 확보하려 하고 있다. 중국 PCB 업체 입장에선 지금이 대규모 자금 조달과 증설에 최적인 셈이다.

다만 전문가들은 중국 업체들의 공격적인 증설로 몇년 후 시장 판도가 달라질 수 있다고 보고 있다. 현재는 AI 서버용 고급 PCB 공급이 부족하고 가격 협상력도 공급자 쪽으로 기울어 있다. 하지만 중국 업체들이 동시에 대규모 증설에 나서면 1~2년 뒤에는 상황이 달라질 수 있다는 논리다.
중국 인쇄회로기판(PCB) 업체들이 인공지능(AI) 붐을 타고 기존 범용 저가 제품에서 고성능 기판으로 빠르게 전환을 시도하고 있다.  /후스전자
중국 인쇄회로기판(PCB) 업체들이 인공지능(AI) 붐을 타고 기존 범용 저가 제품에서 고성능 기판으로 빠르게 전환을 시도하고 있다. /후스전자
중국 PCB 산업은 이미 세계 최대 생산 기반을 갖췄다. 중국 PCB 시장 매출은 2020년 333억달러에서 2024년 420억달러로 늘었다. 2029년에는 503억달러에 이를 것으로 점쳐지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AI 데이터센터 투자 속도가 둔화하거나 엔비디아나 구글 등 주요 업체의 신제품 도입이 지연되면 가격 경쟁이 다시 불 붙을 것"이라며 "중국 업체들이 자본력과 생산 규모를 앞세워 중고급 제품까지 대량 공급에 성공하면 한국 업체들은 최상위 제품으로 올라서야 한다는 압박에 직면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한국 대표 PCB 업체로는 삼성전기, LG이노텍, 대덕전자, 이수페타시스, 심텍 등이 있다.

베이징=김은정 특파원 ke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