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범 '풍경 #1'.
김범 '풍경 #1'.
작가의 아이디어를 미술로 표현하는 개념미술은 관객들이 가장 당황스럽게 느끼는 미술 장르 중 하나다. 예컨대 지금 서울 사간동 국립현대미술관에 전시돼 있는 김범 작가의 '풍경 #1'(1995)에는 이런 뜻의 영어 문장이 적혀 있다.

"이 푸른 하늘을 보시오. 이 나무들을 응시하시오. 여기 흐르는 강을 보시오."

텅 빈 캔버스에 글만 몇 줄 적어놓고 작품이라니. 예쁜 그림과 멋진 조각을 기대하며 미술관에 들어섰다면 실망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수수께끼를 풀 때처럼 시간을 들여 작품을 보면 감상이 달라진다. 김범의 작품에는 아무것도 그려져 있지 않지만, 문장을 읽는 순간 머릿속에는 풍경이 떠오른다.

‘그림이 없는데도 이미지가 생각나네. 그럼 나는 그림 그 자체를 보는 걸까, 그림을 보고 떠오른 내 생각을 보는 걸까?’

이렇게 인식이 전환되는 경험이 개념미술의 핵심이자 재미다. 그래서 배명지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관은 개념미술을 “눈이 아니라 머리를 건드리는 미술”이라고 설명했다.

평범한 동작, '사건'이 되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이것은 개념미술이 (아니)다'는 작가 28명의 작품 140여 점을 통해 한국 개념미술을 집중 조명하는 대규모 기획전이다. 전시는 1970년대 개념미술 작가들의 '행위'에서 출발한다.
전시 초입의 전경.
전시 초입의 전경.
1975년 이건용 작가는 ‘장소의 논리’에서 전시장 바닥에 분필로 원을 그렸다. 이후 원 밖에 서서 중심을 가리키며 "저기"라고 외쳤다가, 원 안으로 들어가 바닥을 가리키며 "여기"라고 했다.

같은 자리인데 작가가 선 위치에 따라 부르는 이름이 달라지듯, 장소는 고정된 게 아니라 말과 몸의 관계 속에서 정해진다는 뜻이다. 김용민의 '물걸레'(1976)에서 작가는 젖은 수건을 들어 비틀고 털어 접기를 반복한다. 이처럼 평범한 동작을 하나의 '사건'으로 바꾸는 것이 1970년대 한국 개념미술의 대세였다.

그렇다면 당시 개념미술 작가들은 왜 이런 기행을 벌였을까. 배 학예연구관은 “같은 시기 우연과 즉흥 위주였던 서구의 개념미술과 달리 한국 작가들은 논리적이고 반복적인 작업을 선호했다”며 “당대 한국의 개념미술 작품은 사회적 모순과 혼란에 맞서기 위해 나름대로의 논리와 질서를 세우려 한 흔적으로 읽힌다”고 해석했다.

개념미술로 바라보는 현실

개념미술은 현실을 다시 바라보게 하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주재환 작가의 '내돈'(1998)은 멀리서 보면 추상화지만, 가까이 가면 실제 은행 통장 위에 '내돈'이라는 글자가 색연필로 수천 번 적혀 있다. '내돈'은 '돈 내'로도 읽힌다. 외환위기 직후 한국인이 겪은 불안을 표현한 작품이다.
주재환 '내돈'.
주재환 '내돈'.
성능경 '세계전도'.
성능경 '세계전도'.
곽덕준 작가의 '4개의 시계'(1973)는 똑같은 시계 네 개가 서로 다른 시각을 가리킨다. 객관적 기준이라 믿었던 시간도 사실은 사람들 사이의 약속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성능경 작가의 '세계전도'(1974)는 대형 세계지도의 외곽만 남기고 안쪽을 약 300조각으로 잘라 임의로 재배치했다. 대륙도 국경도 알아볼 수 없는 지도를 통해 성능경은 세계지도가 역사적·정치적 산물이라는 사실을 일깨운다.

이번 전시를 위해 미술관은 개념미술 전문가인 알렉산더 알베로 컬럼비아대 교수를 6개월간 초청해 연구를 쌓았다. 단색화 일색이던 한국 미술의 대외 이미지를 바꾸려는 시도로 읽힌다. 작품을 다 보고 "역시 개념미술은 싫다"고 결론 내려도 괜찮다. 관객을 생각하게 만들고 다양한 반응을 끌어내는 것 자체가 개념미술의 의도다. 전시는 10월 11일까지, 입장료 2000원.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