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양인 이야기는 원가족을 찾을 때 비로소 시작된다, 신간 <나의 통역사>
한국계 덴마크인 리 랑그바드 지음
친부모를 만난 뒤에야 시작되는 '진짜 이야기'
극본 형식과 공백으로 감정 세밀하게 묘사
친부모를 만난 뒤에야 시작되는 '진짜 이야기'
극본 형식과 공백으로 감정 세밀하게 묘사
덴마크 작가 리 랑그바드의 장편소설 <나의 통역사>는 그 시간들을 다룬다. 어린 시절 덴마크로 입양된 여성이 성인이 돼 한국의 원가족을 만난 뒤, 그들과 관계를 만들어 나가는 이야기다.
대화는 통역사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 통역사는 주인공의 연인이기도 하다. 주인공은 자신이 레즈비언이라는 사실, 통역사와도 연인 관계라는 사실을 원가족에게 쉽게 밝히지 못한다.
이 설정은 작품에 묘한 긴장을 만든다. 통역사는 주인공을 가족에게 이어주는 통로이지만, 동시에 주인공이 의지할 수밖에 없는 존재기도 하다. 어떤 말을 그대로 옮길지, 어떤 말은 부드럽게 바꿀지, 어떤 말은 끝내 전달하지 않을지 판단하는 위치에 선다.
통역은 단순한 번역이 아니라 높은 위치에서 하는 선택에 가까운 것이다. <나의 통역사>는 그 선택들이 관계의 결과 인물들의 감정을 어떻게 바꾸는지도 섬세하게 보여준다.
작품의 형식은 독특하다. ‘내가 말한다’ ‘통역사가 말한다’ ‘어머니가 말한다’ 같은 지문 뒤에 대사가 이어지는 극본 형태다. ‘나는 생각한다’ 이후에 이어지는 말로 발화되지 못한 주인공의 생각도 엿볼 수 있다.
한국어 대사가 상당 부분 공백으로 처리된다는 점도 중요한 포인트다. 작가는 최근 한국 기자들을 만나 처음에는 덴마크어, 한국어, 영어가 모두 들어가는 작품을 구상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그는 “한국어가 부족했기 때문에 도움을 받아야 했다”며 “몇 달간 시도하다가 공백을 살려야겠다고 결심했다”고 말했다.
결과적으로 이 작품에서 공백은 단순한 빈칸이 아니다. 언어 장벽뿐 아니라 입양인이 접근할 수 없는 정보, 문화, 역사를 포함한 상실감을 표현한다. 리 랑그바드는 “침묵은 부재와 상실을 표현하지만 동시에 그 자체로 새로운 언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리 랑그바드는 1980년 서울에서 태어나 생후 두 달 만에 덴마크로 입양됐다. 이후 친가족을 찾았고, 오랫동안 국가 간 입양 문제를 작품으로 다뤄왔다. 전작 <그 여자는 화가 난다>의 주된 정서는 분노였다. 산업화된 입양, 초국가적 입양 시스템에 대한 비판을 전면으로 내세웠다.
반면 <나의 통역사>에선 슬픈 감정이 작품 전반에 깊이 깔려 있다. 주인공은 친부모와 만나는 자리에서 뜻밖에 눈물이 쏟아지기도 한다. 분노보다 상실과 슬픔, 그리고 관계 회복의 가능성을 응시하는 것이다.
저자에게 친부모와의 만남은 자신의 ‘진짜 출발점’을 찾는 과정이었다. 그는 “친부모와의 만남 이전에 입양인의 삶은 공항에서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그 전의 모든 과거는 지워진 상태다”며 “친생모를 만났을 때 ‘나를 닮은 엄마가 나를 출산했구나’를 느끼면서 내 역사가 진짜 출생에서부터 시작한다는 점을 느낄 수 있었다”고 강조했다.
최한종 기자 onebel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