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전경. ⓒWhanki Foundation·Whanki Museum 이미지 글로벌세아 아트스페이스 제공
전시 전경. ⓒWhanki Foundation·Whanki Museum 이미지 글로벌세아 아트스페이스 제공
한국 현대미술 작품 중 최고가 그림이 처음으로 ‘누워서’ 관객과 만난다. 2019년 크리스티 홍콩 경매에서 132억원(수수료 포함 약 153억원)에 팔린 김환기(1913~1974)의 1971년작 ‘우주(05-IV-71 #200)’ 얘기다. 이 두 폭짜리 작품은 그동안 전시장에 나올 때 늘 두 폭을 나란히 세운 정사각형 형태로 걸렸다. 그런데 지금 서울 대치동 글로벌세아아트스페이스에는 두 폭을 90도 눕혀 가로로 길게 이어 전시돼 있다.

일반적인 작품을 이렇게 눕혀서 건다면 원작 왜곡 논란이 일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생전의 김환기도 인정한 전시 방법이다.

1970년대 이 그림을 산 사람은 김환기의 오랜 친구이자 후원자였던 재미동포 김마태 박사. 그런데 집 층고가 낮았던 탓에 김환기와 상의 후 작품을 옆으로 눕혀 거실 벽을 따라 길게 걸었다. 김환기가 작품 앞에서 찍은 사진도 남아 있다.
1972년 김마태 박사의 거실에 걸린 우주(Universe, 05-IV-71 #200)와 그 앞에 앉아있는 김환기. 소파 뒤쪽에 두 폭의 그림을 가로로 배치해 걸었다. 사진 © 환기재단•환기미술관
1972년 김마태 박사의 거실에 걸린 우주(Universe, 05-IV-71 #200)와 그 앞에 앉아있는 김환기. 소파 뒤쪽에 두 폭의 그림을 가로로 배치해 걸었다. 사진 © 환기재단•환기미술관
지금 글로벌세아아트스페이스(옛 S2A)에서 열리고 있는 ‘한국현대회화 하이라이트: 모더니즘과 도전’에는 이 작품을 비롯해 한국 근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작품들이 걸려 있다. 김환기, 이우환, 박서보 등 한국 근현대 회화를 대표하는 작가 14명의 작품 25점을 ‘한국 현대미술 명화전’처럼 소개하는 전시다. 전시 흐름에 맞춰 꼭 봐야 할 작품들을 짚었다.

(1) 김환기의 ‘우주’

한국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작가 김환기는 한국의 전통 미술과 자연을 사랑했다. 백자대호라는 멋없는 이름의 백자에 ‘달항아리’라는 이름을 붙이고 이를 널리 퍼뜨린 사람이 김환기다. 1950~1960년대 그는 달항아리·산·섬 등 한국적인 소재를 단순한 선과 면, 서정적인 색감으로 표현하는 데 주력했다. 전시장에 나온 ‘귀로’(1950년대), ‘내가 살던 곳’(1956), ‘섬’(1960년대) 등이 이 시기 그림이다.

1963년 50세의 김환기는 세계 미술의 새로운 중심지로 떠오른 미국 뉴욕으로 이주해 새로운 도전을 시작한다. 여러 화풍을 시험한 끝에 그가 도달한 화풍이 전면점화(全面点畵)다. 캔버스 위에 수많은 점을 찍는 이 화풍으로 김환기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동양적인 사유를 표현했다.
2019년 크리스티 홍콩 경매에서 '우주'가 경매에 오른 모습. 크리스티 제공
2019년 크리스티 홍콩 경매에서 '우주'가 경매에 오른 모습. 크리스티 제공
전시장에서는 붉은색 점화인 ‘무제’(1971)와 함께 ‘우주’를 만날 수 있다. 글로벌세아아트스페이스의 ‘간판’인 이 작품은 2019년 홍콩 경매에서 한국 미술품 사상 최고가에 낙찰된 뒤 주인이 밝혀지지 않아 세간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소장자가 김웅기 글로벌세아그룹 회장으로 밝혀진 건 3년이 흐른 2022년이다. 김 회장은 글로벌세아아트스페이스 개관전을 계기로 소장 사실을 깜짝 공개했다.

(2) 이우환의 ‘바람으로부터’

세계적인 현대미술 작가 이우환은 일본에서 철학을 공부한 뒤 일본을 중심으로 활동해 왔다. 그는 서양 철학과 동양 사상을 토대로 그림이 무언가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사물과 사물, 작품과 보는 사람 사이의 ‘관계’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1969년에는 일본의 주요 현대미술운동 사조인 ‘모노하(物派)’ 이론을 세워 이름을 알렸다. 만들거나 꾸미는 대신 돌이나 철판 같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놓아 관계를 보게 하는 흐름이다.

그의 작품 제목이 ‘점으로부터’ ‘선으로부터’ 등 ‘~부터’로 끝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자신은 출발점을 내놓을 뿐, 그림을 완성하는 것은 보는 이의 몫이라는 뜻이 제목에 담겨 있다. 전시장에서는 그의 주요 연작을 화풍별로 만나볼 수 있다.
이우환, 바람으로부터, 1986, 캔버스에 유채, 광물 안료, 1818 x 2273cm ⓒLee Ufan  ADAGP, Paris – SACK, Seoul, 2026, 이미지 글로벌세아 아트스페이스 제공
이우환, 바람으로부터, 1986, 캔버스에 유채, 광물 안료, 1818 x 2273cm ⓒLee Ufan ADAGP, Paris – SACK, Seoul, 2026, 이미지 글로벌세아 아트스페이스 제공
이번 전시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이우환의 작품은 ‘바람으로부터’다. 1980년대 들어 그는 이때까지 화면에 구성해온 질서를 흐트러뜨리고 자유롭게 붓을 휘두른다. 바람에 날리듯 화면을 어지럽게 가로지르는 획에서 생동하는 기운이 느껴진다.

(3) 정상화의 ‘무제 90-5-20’

21세기 한국 현대미술의 대표 브랜드인 단색화의 핵심은 수신(修身)이다. 단색화가들은 동양적인 수행의 정신을 그림에 담기 위해 선을 긋고 캔버스에 물감을 칠하는 등 같은 행위를 끝없이 반복했다. 이번 전시에서는 박서보, 정상화, 하종현, 김창열 등 단색화를 대표하는 화가들의 작품을 한자리에서 만나볼 수 있다.
정상화, 무제 90-5-20, 1990, 캔버스에 아크릴릭, 260 x 194cm ⓒ이미지 글로벌세아 아트스페이스 제공
정상화, 무제 90-5-20, 1990, 캔버스에 아크릴릭, 260 x 194cm ⓒ이미지 글로벌세아 아트스페이스 제공
지난 1월 별세한 정상화 화백의 ‘무제 90-5-20’(1990)을 특히 눈여겨볼 만하다. 정 화백의 작품 제작 과정은 노동에 가까웠다. 먼저 캔버스에 고령토를 발라 말린다. 천을 틀에서 떼어 접으면 마른 고령토에 격자 모양 균열이 생긴다. 그 후 갈라진 조각을 일일이 떼어내고 그 자리를 물감으로 메운다. 떼어내고 메우길 예닐곱 번 거쳐야 작품이 완성된다. 이렇게 완성된 작품은 멀리서 보면 한 덩어리 푸른 면이지만, 가까이 보면 빼곡히 박혀 있는 작은 격자들에서 시간과 노동이 쌓여 만든 깊이를 읽을 수 있다.

(4) 박고석, 김종학…한국미술 수놓은 별들

전시의 뼈대는 김환기와 이우환, 단색화가들이다. 하지만 그 사이사이 자신만의 길을 걸은 구상 작가들의 작품이 배치돼 관객의 눈길을 잡아끈다.

박고석은 전국의 산을 오르내리며 그림을 그린 ‘산의 화가’다. ‘외설악’(1973)의 굵은 붓질은 마치 산이 코앞에 다가선 듯한 느낌을 준다. ‘설악의 화가’로 불리는 김종학은 설악의 들꽃과 풀, 벌레의 생명력을 독창적인 화풍으로 그려낸 화가다. 이번 전시에서는 봄꽃 축제를 주제로 한 ‘봄’(2006)이 나왔다. 화사한 봄을 맞은 즐거움을 그대로 담은 작품이다.
박고석, 외설악, 1973, 캔버스에 유채oil on canvas, 379×455cm
박고석, 외설악, 1973, 캔버스에 유채oil on canvas, 379×455cm
김종학, 봄, 2006, 캔버스에 유채oil on canvas, 97x1455cm
김종학, 봄, 2006, 캔버스에 유채oil on canvas, 97x1455cm
이 밖에도 주목할 만한 작가가 많다. 신라 토기의 청회색을 즐겨 쓴 권옥연, 대지를 여성에 빗대 수많은 점으로 화면을 채운 이성자, 청각장애를 딛고 구상과 추상을 넘나든 김기창과 그의 아내 박래현 등 다양한 작가의 대표 화풍을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는 전시다. 관람료 5000원, 전시는 8월 1일까지.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